빨간 머리 앤 8권 27~28

나단비 | 2024.04.19 11:22:06 댓글: 0 조회: 67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62382
27
기다림



잉글사이드
1917년 11월 1일

이윽고 11월이 되었다. 글렌은 회색과 갈색의 음울한 풍경을 띠었지만, 롬바르디 미루나무가 서 있는 곳은 여기저기 거대한 황금빛 횃불을 켜놓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미루나무를 뺀 다른 나무들은 모두 잎이 졌다. 요즘 들어서는 용기를 갖고 살기가 어렵다. 이탈리아군이 카포레토에서 대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절망스러운 심정이 되었다. 수잔 아줌마마저도 위안이 되는 말을 끌어내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은 아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올리버 선생님은 절망적으로 “베니스만은 빼앗기지 말아야 할 텐데, 베니스만은 빼앗기지 말아야 할 텐데.” 하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렇게 말을 하면 그런 일을 막을 수 있기라도 한 듯이. 그러나 어떻게 하면 베니스를 빼앗기지 않을지 나는 방법을 전혀 모르겠다. 수잔 아줌마가 잊지 않고 지적하는 말대로 1914년에 파리를 빼앗기지 않은 것처럼 베니스도 빼앗기지 않을지 모른다. 난 그런 일이 없기를 얼마나 바라고 기도하고 있는지 모른다. 아, 베니스! 아드리아 해의 아름다운 여왕 베니스를 지킬 수 있기를. 난 베니스에 가본 적은 없지만, 베니스는 바이런과 같은 마음을 갖고 있다. 나는 베니스를 사랑한다. 내게 베니스는 마음의 요정과도 같은 도시다. 베니스에 대한 나의 동경은 틀림없이 월터 오빠에게서 감염되었을 것이다. 월터 오빠는 베니스를 굉장히 예찬했었다. 베니스를 보는 것이 월터 오빠의 꿈이었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 어느 날 저녁 월터 오빠와 나는 ‘무지개 골짜기’에 앉아 언젠가 둘이 함께 베니스로 가서 달밤에 곤돌라를 타고 다녀보자고 했다.
전쟁이 일어난 후로 가을만 되면 아군이 큰 타격을 입었다. 1914년에는 안트베르펜이, 1915년에는 세르비아가, 그리고 작년 가을에는 루마니아, 그리고 올가을에는 이탈리아가 그 어느 때보다 더 심각하게 참패를 당했다. 월터 오빠가 마지막 편지에 써 보냈던 ‘이 전쟁에서 싸우고 있는 병사는 살아 있는 사람만이 아니야. 죽은 사람들도 싸우고 있어. 그런 군대는 절대 패배하지 않아.’라는 말이 아니었으면 난 절망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그래, 우리는 질 리 없다. 결국에는 우리가 이길 것이다. 한순간이라도 그런 사실을 의심하지 않겠다. 의심은 내 신념을 저버리는 일이다.
얼마 전 우리는 새로 발행된 승리 공채를 팔려고 맹렬하게 운동을 벌였다. 우리 적십자 소녀단 단원들은 부지런히 공채를 사도록 권하고 다녔다. 말을 꺼내자마자 절대로 사지 않겠다고 완강하게 거절하는 까다로운 사람도 몇 있었다. 나도, 심지어는 나까지도 구레나룻 난 보름달을 상대해야 했다. 나는 당연히 기분 상할 말을 듣거나 거절당할 거라고 각오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는 상당히 친절하게 나를 대해주었고, 그 자리에서 바로 천 달러짜리 공채를 사겠다고 약속했다. 그 사람이 반전주의자이기는 해도 좋은 투자처를 거부할 마음은 없었던가 보았다.
아빠는 프라이어 씨가 개심한 것은 공채 구입 장려대회에서 수잔 아줌마가 한 연설 덕분이라며 아줌마를 놀렸다. 나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한다. 프라이어 씨가 아줌마에게 청혼했을 때 아줌마는 너무나 분명하게 거절의 뜻을 밝힌 뒤로 대놓고 아줌마를 비난하고 다니는 마당에 그럴 리가 없다. 어쨌거나 아줌마가 연설한 것은 사실이다. 더구나 그 대회에서 가장 훌륭한 연설이었다. 아줌마는 자신이 그런 자리에 나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거라고 맹세했다.

글렌 마을 사람들이 모두 그 자리에 모였고 연설하는 사람도 꽤 많았다. 하지만 별다른 감동이나 열정도 없이 그저 그런 분위기였다. 아줌마는 이 섬이 공채 판매에서 일등을 차지하길 원했는데 연설대회 진행되는 꼴이 아무래도 못마땅했다. 실망한 아줌마는 올리버 선생님과 내게 연설에 저렇게 패기가 없어서야 쓰겠느냐고 계속해서 쓴소리를 해대고 있었다. 드디어 연설대회가 끝났지만 공채를 사러 나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을 보자 아줌마는 그만 머리가 돌아버렸다. 아줌마가 나중에 한 말에 따르면 정말 그랬다. 아줌마는 벌떡 일어섰다. 보닛 밑으로 드러난 얼굴은 근엄하기 짝이 없었다. 그나저나 글렌 세인트 메리에서 아직도 보닛을 쓰는 사람은 아줌마뿐이었다. 아줌마는 큰 소리로 한껏 비꼬며 말했다.
“애국하려고 돈을 내놓는 것보다는 입으로 애국주의를 부르짖기가 더 쉽지요. 우리가 지금 구걸을 하고 있는 건가요? 공짜로 당신네들 돈을 빌려달라는 건가요? 카이저가 이 대회 이야기를 듣는다면 얼마나 비웃을까요?”
수잔 아줌마는 프라이어 씨 같은 카이저의 간첩이 글렌 마을에서 일어나는 일을 하나도 남김없이 죄다 카이저에게 보고하는 것으로 굳게 믿고 있었다.
“잘 들어요! 잘 들어!”
노먼 더글러스 씨가 외쳤다.
“로이드 조지는 어떻고요?”
뒤에 서 있던 소년들은 아줌마가 좋아하지 않는 말투로 외쳤다. 키치너 경이 없는 지금 수잔 아줌마가 가장 좋아하는 영웅은 로이드 조지였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로이드 조지를 믿어요.”
아줌마가 되받아쳤다.

“그 말을 들으면 로이드 조지가 아주 기뻐하겠군요.”
워런 미드가 비웃듯 기분 나쁘게 ‘휘! 휘!’소리를 내며 외쳤다.
워런의 야유는 수잔 아줌마에게 화약고에 불을 지른 격이었다. 아줌마는 자기가 하고 싶은 소리를 다 해버렸다. 그것도 아주 멋지게. 아줌마의 한바탕 연설에는 패기가 부족하지도 않았다. 아줌마가 일단 연설을 시작하자 말솜씨도 아주 훌륭했으며 자기를 비웃던 남자들을 공격하는 방식은 훌륭하면서도 우습기도 하고 아주 재치가 넘쳤다.
아줌마는 자기와 같은 사람들이, 몇백만이나 되는 사람들이 로이드 조지 뒤에 굳게 버티고 서서 격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것이 아줌마가 한 연설의 주된 골자였다. 우리 멋진 아줌마!
아줌마는 애국심과 충성심을 정열적으로 쏟아내며 온갖 핑계를 대고 빠져나가는 병역 기피자에게 경멸을 웅변적으로 쏟아냈고, 그 말을 듣는 청중들도 감전이라도 된 듯 호응해주었다. 아줌마는 언제나 자기가 여성의 참정권을 주장하는 사람은 아니라고 했지만, 그날 저녁 아줌마는 여자의 가치를 제대로 보여주었고, 남자를 옴짝달싹못하게 만들어버렸다. 아줌마가 연설을 끝내자 모두들 아줌마의 명대로 따를 준비가 되었다. 아줌마는 사람들에게 앞으로 나와 공채를 사도록 명령했다. 그렇다. 그것은 명령이었다. 모두들 아줌마에게 엄청난 박수갈채를 보낸 다음 줄줄이 앞으로 나와 공채를 샀다. 워런 미드까지도.
다음 날 샬럿타운의 일간지에 실린 공채 판매 금액의 총계는 글렌 마을이 섬 전체에서 일등이었다. 그 결과는 확실히 아줌마 덕이었다. 아줌마는 그날 밤 집에 돌아오자 매우 수줍어하며 시집도 안 간 여자에게 적절치 않은 행동이 아니었을까 걱정하며 “여자답지 못한 짓을 했어요.” 하고 어머니에게 후회하는 말을 했다.
아까 저녁때 아줌마를 뺀 우리 식구 모두는 아빠의 새자동차 시운전을 나갔다. 매우 즐거운 드라이브였다. 그렇지만 마지막 순간에 어느 까다로운 할머니, 윗마을 노처녀 엘리자베스 카 할머니 덕분에 개천에 빠지는 흉한 꼴을 당하고 말았다. 미스 엘리자베스는 아무리 경적을 울려도 말을 옆으로 비켜 우리를 지나가게 해주려 하지 않았다. 아빠는 몹시 화를 냈지만, 난 속으로 미스 엘리자베스를 동정하는 마음이었다. 만일 나도 노처녀로 늙어서 마음껏 공상에 빠진 채 늙은 말을 몰고 있는 중이라면 뒤에서 아무리 자동차가 시끄럽게 경적을 울린다 해도 말고삐 하나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미스 엘리자베스와 똑같이 고집스럽게 앉아 말했을 것이다.
“꼭 지나가야겠다면 저 도랑으로 가시지요.”
우리는 정말로 개천으로 지나가야 했고, 자동차는 모래 속에 빠져버렸다. 그리고 미스 엘리자베스가 마차를 덜커덩거리며 우리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멀어져 가는 것을 얼빠진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 이야기도 젬 오빠에게 써 보내면 오빠는 배꼽이 빠져라 웃을 것이다. 오빠는 미스 엘리자베스 할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으니까.
그나저나 베니스를 지켜낼 수 있을까?


1917년 11월 19일

베니스는 아직 무사하지 못하다. 아직도 큰 위험에 빠져 있다. 그러나 이탈리아군은 피아베 강 전선을 지켜냈다. 군사 평론가들은 베니스를 지키지 못할 것이 틀림없고, 아디제로 퇴각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수잔 아줌마, 올리버 선생님과 나는 이탈리아가 베니스를 지켜낼 것이라 믿는다. 베니스는 지켜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군사 평론가는 뭐라고 변명할까?
아, 이탈리아군이 베니스를 지켜낼 수 있다고 믿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우리의 캐나다군은 또다시 대승을 거두었다. 파스상달로 밀고 들어가 심한 반격을 받으면서도 지켜내었다. 우리 오빠들은 이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우리 동네의 젊은이가 부상자 명단에 끼어 있었다. 조 밀그레이브도 그 전투에 참여했지만 무사하다고 했다. 미란다는 조에게서 소식이 올 때까지 며칠이나 안절부절못하며 지냈다. 하지만 미란다는 결혼한 후로 눈부시게 변해서 마치 딴 사람을 보는 것 같다. 심지어는 미란다의 눈까지도 검고 더 깊어진 듯하다. 감정이 전보다 깊어져서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젠 자기 아빠하고도 맞서 교묘히 설복시키는 것을 보면 놀랍다. 그리고 서부전선에서 승전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비록 땅 한 뼘을 빼앗았다고 해도 반드시 마당으로 뛰어나가 깃발을 올린다. 적십자 모임에도 꼭 출석하고 있다. 그리고 아주 ‘부인’다운 태도를 보이기 때문에 우스워서 견딜 수가 없다. 그러나 미란다는 글렌 마을의 전쟁 신부임에 틀림없으니 ‘부인’ 티를 낸다고 이러쿵저러쿵 말할 이유는 없다.
러시아군 소식도 좋지 못하다. 카렌스키 정부가 몰락하고 레닌이 러시아의 독재자가 되었다. 이렇게 불안하고 불길한 소식만 들려오는 암담한 가을에 절망적인 기분을 이겨내고 용기를 잃지 않고 지내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하일랜드 샌디 할아버지 말마따나 선거가 가까워져서 조금씩 들뜨기 시작하고 있다. 주요 쟁점은 징병제도이므로 이제까지 없었던 격렬한 선거가 될 것이다. 조 포아리에의 말을 인용하자면 일정 연령에 이른 모든 여자 중에 남편이나 아들이나 남자형제를 전선에 내보낸 사람은 모두 투표할 수 있다. 나도 나이가 스물한 살이면 선거할 수 있었을 텐데! 거트루드 올리버 선생님과 수잔 아줌마는 선거할 수 없다고 단단히 화가 나 있다.
“이건 공평하지 않아요. 아그네스 카 같은 사람도 남편이 전쟁터에 나갔다고 투표할 수 있는데요. 그 여자는 남편을 보내지 않으려고 온갖 수를 다 썼던 사람이라고요. 이제 연방 정부에 반대하는 투표를 할 거예요. 그런데 나에겐 투표권이 없어요. 전쟁터에 간 사람이 내 남편이 아니라 연인이라서요.”
거트루드 올리버 선생님은 화가 나서 말했다.
수잔 아줌마는 프라이어 씨 같은 괘씸한 반전론자도 투표할 수 있는데 왜 자기는 투표할 수 없느냐며 끓어오르는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항구 건넛마을의 엘리엇 집안이나 크로퍼드 집안, 매컬리스터 집안 사람들이 안됐다는 생각이 든다. 그 사람들은 자유당과 보수당 진영으로 뚜렷이 갈렸었는데 지금은 어디에 닻을 내려야 할지 모른 채 갈팡질팡 표류하고 있다. 내 비유가 좀 그렇기는 하지만 아무런 희망도 없이 떠돌고 있다. 골수 자유당 사람들 가운데에는 로버트 보든 경34)에게 투표하기가 죽기보다 싫은 사람도 있을 테지만 투표를 하지 않을 수도 없다. 징병제도가 꼭 필요한 시기가 왔기 때문이다.
징병제도를 반대하는 보수당 사람들은 자기들이 극도로 싫어하는 로리에에게 투표해야만 한다. 이런 일로 몹시 괴로운 심정들이겠지만, 마셜 엘리엇 부인이 교회 통일 문제를 받아들인 것처럼 모두들 받아들이고 있다.
어젯밤에 엘리엇 아주머니가 오셨다. 요즘에는 아주머니가 옛날처럼 우리 집에 자주 올라오지 않는다. 이렇게 멀리 걸어오기에는 너무 늙었다고 말씀하신다. 정다운 ‘미스 코넬리아’가 늙어간다는 생각은 하기도 싫다. 우리는 아주머니를 무척 좋아하고 아주머니도 ‘잉글사이드’ 아이들에게 참 잘해주셨다.
엘리엇 아주머니는 교회 통일 문제에 몹시 반대했다. 하지만 어젯밤에 아빠가 그 문제는 이미 결정이 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하자 아주머니는 체념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든 것이 어지럽기만 한 세상에 살고 있는데 한 가지가 더 어지럽혀지고 찢겨진다 한들 뭐가 문제겠습니까? 독일군에 비한다면야 감리교인들은 아주 예뻐 보입니다.”
우리 적십자 소녀단은 아이린 하워드가 다시 들어왔는데도 잘 돌아가고 있다. 아이린은 로브리지 소녀단에서 빠졌다고 한다. 지난번 만났을 때 아이린은 내게 다정한 척했지만, 사실은 날 빈정거렸다. 내가 샬럿타운 광장을 지날 때 그 ‘초록색 벨벳 모자’를 보고 한눈에 알아보았다나. 모두들 나를 그 꼴 보기 싫은 모자를 보고 알아본다. 그 정나미 떨어지는 모자를 쓴 지도 4년이 지났다. 엄마도 이번 가을에는 새 모자를 사라고 하신다. 하지만 난 싫다고 했다. 이 전쟁이 계속되는 한, 난 이번 겨울에도 그 벨벳 모자를 쓸 것이다.


1917년 11월 23일

피아베 강 전선은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 캄브레에서 줄리안 빙 장군35)이 대승을 거두었다. 나는 승리를 축하하려고 국기를 내걸었다. 수잔 아줌마는 오늘 밤에 물을 좀 끓여놓아야겠다고 말했다. 생각해보니 우리 아기 키치너가 영국의 승전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후두염에 걸리고는 했다. 이 아이의 혈관에 친독파 피가 흐르는 건 제발 아니기를. 아이 아빠 쪽 일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안심할 수 없는 노릇이다.
짐스는 이번 가을에도 두세 번 후두염에 걸렸다. 작년처럼 심한 것은 아니었고 그냥 지나가는 것이었다. 짐스의 작은 혈관에 어떤 피가 흐르든 건강하고 좋은 피인 것은 분명하다. 짐스는 장밋빛으로 통통하게 살이 쪘고, 머리는 곱슬곱슬하니무척이나 귀엽게 생겼다. 그리고 이상한 말을 상당히 잘하고 아주 웃기는 질문도 곧잘 한다. 짐스는 부엌에 오면 특별히 좋아하는 의자가 있다. 그러나 그 의자는 아줌마도 좋아하는 의자이므로 아줌마가 차지하려면 짐스가 비켜야만 한다. 지난번에는 아줌마가 짐스를 그 의자에서 내려놓자 짐스가 정색을 하고 쳐다보면서 말했다.
“할머니는 언제 죽을 거야? 할머니가 죽어야 내가 그 의자에 앉을 수 있는 거잖아.”
아줌마는 아이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예삿일은 아니라고 여기고 그때부터 짐스의 조상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요전 밤 나는 짐스를 데리고 가게까지 걸어갔다. 짐스가 밤늦게 밖에 나간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짐스는 별을 보자 외쳤다.
“오, 윌라. 저기 큰 달을 봐! 그리고 저 많은 작은 달들도!”
그리고 지난 수요일 아침에 짐스가 일어나서는 자명종 시계가 멈춤 것을 보았다. 내가 깜박 잊고 태엽 감는 것을 잊어버린 것이다. 짐스는 침대에서 뛰어나와 나에게 달려왔다. 파란 플란넬 잠옷을 입은 짐스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시계가 죽었어, 오, 윌라. 시계가 죽었어.”
어느 날 밤 짐스는 수잔 아줌마와 내게 몹시 화가 나 있었다. 짐스가 갖고 싶어 하는 것이 있었는데 우리가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잠자리에 들기 전 기도를 하면서도 짐스는 화가 나서 부루퉁해 있었다.
“저를 착한 아이가 되게 해주세요.” 하고 기도하고는 다시 큰 목소리로 “그리고 제발 윌라와 할머니도 착하게 해주세요. 두 사람은 착하지가 않거든요.” 하고 덧붙였다.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짐스가 한 말을 얘기해준다. 다른 사람이 그런 짓을 하면 참 지겹고 한심한 사람이라고 흉을 보지 않았던가! 난 그 말을 이 일기장에도 써두어 기억할 것이다!
아까 저녁에도 짐스를 재우는데 짐스가 나를 진지한 얼굴로 올려다보며 물었다.

“어제는 왜 돌아오지 않아, 윌라?”
“오, 왜 돌아올 수 없을까, 짐스?”
그 아름답던 ‘어제’, 꿈과 웃음이 넘치던 오빠들이 여기 함께 있던 어제는 왜 돌아오지 않을까? 월터 오빠와 나는 함께 ‘무지개 골짜기’에서 책을 읽거나 산책하며 막 떠오른 달과 저녁 해를 바라보고는 했다. 그 시절이 돌아올 수만 있다면! 하지만 어제는 절대로 돌아오지 않는단다, 짐스. 오늘은 어두운 구름에 덮여 있고, 내일은 감히 생각해볼 수도 없구나.


1917년 12월 11일

오늘은 기쁜 소식이 왔다. 영국군이 어제 예루살렘을 점령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국기를 걸었다. 올리버 선생님도 조금이나마 기운을 되찾았다.
“십자군이 목표로 삼았던 곳에 이르다니 살아 있었던 보람이 있어. 어젯밤에는 옛 십자군의 망령들이 예루살렘 성벽으로 다 몰려들었을 거야. 영국의 사자왕 리처드를 선두로 해서 말이야.”
올리버 선생님은 말했다.
수잔 아줌마 역시 흡족했고 그 나름의 이유도 있었다.
“예루살렘이니 헤브론은 제대로 발음할 수 있으니 정말 감사한 일이에요. 프셰미실이니 브레스트 리토프스크니 하는 이름을 발음하느라 힘들었는데 참으로 편안하군요. 터키군은 도망치고 있고, 베니스는 무사하고, 랜즈다운 경 따위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돼요. 이제 걱정할 일은 없다고요.”

아줌마가 말했다.
예루살렘! 그 위에는 이제 영국의 유니언 잭 깃발이 펄럭이고 있다. 터키의 초승달 국기는 사라졌다. 월터 오빠가 들었으면 얼마나 기뻐했을까!


1917년 12월 18일

어제 선거가 끝났다. 저녁때가 되자 엄마와 수잔 아줌마, 올리버 선생님과 나는 거실에 모여 숨도 쉬지 못할 만큼 불안한 가운데 결과를 기다렸다. 아빠는 볼일이 있어 나가고 안 계셨다. 우리는 소식을 들을 방법이 없었다. 카터 플래그네 가게는 우리 선과 다르기 때문이었다. 그쪽으로 연결하려고 할 때마다 계속해서 통화 중이었다. 근처 사람들이 전부 우리와 같은 이유로 카터 플래그네 가게로 전화를 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10시 정도가 되어 올리버 선생님이 전화 수화기를 들었을 때 항구 건넛마을 사람이 카터 플래그 씨와 이야기하는 소리가 우연히 들렸다. 올리버 선생님은 수치심도 없이 그 대화를 엿들었다. 그 결과, 옛말 그른 것 하나도 없다는 말이 있듯이 남의 말을 엿들은 벌을 톡톡히 받았다. 아주 불쾌한 말을 들은 것이다. 서쪽에서는 연방 정부가 표를 거의 얻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낙심한 채로 서로의 얼굴만 마주 보았다. 서쪽에서 지지를 받지 못했다면 지게 되는 것이다.
“캐나다는 온 세상이 보는 앞에서 창피한 꼴을 당하게 되는 거야.”
올리버 선생님이 쓰디쓰게 말했다.

“만일 사람들이 모두 항구 건넛마을 마크 크로퍼드 집안사람들 같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요. 그 집안사람들은 오늘 아침 큰아버지를 헛간에 가두고 연방 정부에 투표하기로 약속할 때까지 못 나오게 했대요. 그거야말로 효과적인 방법 아니에요, 사모님?”
아줌마가 신음하듯 말했다.
올리버 선생님과 나는 마음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다리가 아파 앉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때까지 방 안을 서성였다. 엄마는 태연하고 고요하게 앉아 태엽을 감아놓은 기계처럼 쉬지 않고 침착하니 뜨개질만 계속해 부러워했지만, 우리 모두가 속았다는 것을 다음 날에 알게 되었다. 엄마는 어젯밤에 짠 양말을 다 풀고 있었다. 뒤꿈치를 짜기 시작해야 할 곳을 그냥 지나쳐버리고 짜 올라간 것이다.
12시가 다 되어서야 아빠가 돌아오셨다. 아빠는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우리를 보았다. 우리도 아빠를 보았다. 어떤 소식을 듣지 못했느냐고 감히 물어볼 수도 없었다. 그러자 아빠는 형편없었던 쪽은 로리에이고 연방 정부가 대다수의 표를 얻어 이겼다고 하셨다. 올리버 선생님은 손뼉을 쳤고, 나는 웃고 싶었다, 울고 싶었다 했다. 엄마의 눈은 옛날처럼 빛났고, 아줌마는 기쁨의 외침 소린지 비명 소린지 모를 괴상한 소리로 말했다.
“이 소식을 들으면 카이저 기분이 그다지 좋지 못하겠군요.”
그날 밤 모두 잠자리에 들었지만 너무 흥분한 나머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정말이지 오늘 아침에 아줌마가 정색하고 말했던 바로 그대로다.
“사모님, 여자에게 정치는 너무 고된 일이에요.”

1917년 12월 31일

전쟁이 시작된 이후로 네 번째 크리스마스가 지났다. 마음을 강하게 먹고 앞으로 또 한 해를 맞이하려 한다. 온 여름 내내 승세를 이어간 쪽은 독일이었다. 지금 독일은 봄이 되면 연합군이 대공세를 펼칠 거라는 소식에 러시아 전선의 군대를 모두 이동시키고 있다고 한다. 그때까지 기다리느라 도저히 겨울을 참아내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가끔 있다.
이번 주는 해외에서 편지가 많이 왔다. 이제는 셜리 오빠도 전선에 나가 있다. 셜리 오빠는 마치 퀸스 학교에서 벌인 축구 경기에 쓰듯 전쟁 이야기를 아주 사실적으로 침착하게 적어 보냈다. 칼은 몇 주째 비가 온다고 했다. 참호 속에서 밤을 보내다 보면 어렸을 적 헨리 워런의 유령을 보고 도망친 벌로 묘지를 지키고 있어야 했던 밤이 생각난다고 썼다. 칼의 편지는 언제나 우스갯소리며 재미있는 일로 가득했다. 이 편지를 쓰기 전날 밤에는 쥐잡기가 대대적으로 펼쳐졌다고 했다. 다들 총검을 휘둘러 쥐를 잡았는데 칼이 제일 많이 잡아서 상을 탔단다. 칼을 알아보고 밤이 되면 칼의 주머니에서 잠을 청하는 순한 쥐도 한 마리 있다나. 쥐들이 다른 사람은 괴롭혀도 칼은 괴롭히지 않는다고도 했다. 칼은 원래부터 작은 동물들과 사이가 좋았으니까. 지금 참호 안에 사는 쥐의 습성을 연구 중인데 언젠가는 논문으로 써서 유명해질 작정이라고도 했다.
케네스 오빠에게서도 짤막한 편지가 왔다. 요즘 케네스 오빠가 보내오는 편지는 모두 짧다. 내 마음을 달콤하게 해줄 다정한 말을 적는 일도 드물다. 전쟁터로 떠나기 전 마지막 인사를 하러 왔던 날 일을 완전히 잊어버린 건 아닌가 싶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다시 편지를 읽어보면 케네스 오빠가 그 일을 분명 기억하고 있으며 언제까지나 잊지 않을 것이란 마음을 드러낸 글귀가 한 줄이나 한 마디 정도 들어 있는 것도 같다. 예를 들어 오늘 받은 편지 내용은 전혀 특별한 사람에게 쓴 편지라고 볼수 없을 만큼 평범하기 짝이 없지만, 자기 이름을 다른 때처럼 ‘케네스로부터’라고 쓰는 대신 ‘당신의 케네스로부터’라고 쓴 것이 그렇다. 케네스가 무슨 생각이 있어 ‘당신의’란 말을 붙인 것일까? 아니면 아무 생각 없이 그 말을 붙였을까? 오늘 밤에는 그 문제로 고민하느라 잠을 자지 못할 것 같다. 케네스 오빠는 이제 대위로 진급했다. 나는 기쁘기도 하고 자랑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포드 대위라고 하면 소름 끼칠 정도로 멀고 높은 곳에 있는 사람으로 느껴진다. 케네스 오빠와 포드 대위가 서로 다른 사람처럼 생각된다. 나는 정말 케네스 오빠와 약혼했는지도 모른다. 그 문제에 대해 엄마가 한 말이 내 마음에서 떠나지 않고 보루가 되어주고 있다. 그러나 포드 대위와 약혼했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다!
젬 오빠도 지금은 중위다. 전쟁터에서 진급했다. 새 중위 군복을 입고 찍은 사진을 보내왔다. 사진 속의 오빠는 더 말라 보이고 더 늙어 보였다. 소년이었던 우리 오빠 젬과는 너무 달랐다. 내가 보여준 오빠 사진을 보고 변하던 엄마 얼굴을 잊을 수 없다. 엄마가 한 말은 “이게 우리 젬이야? 그 ‘꿈의 집’의 아기 젬?” 하는 게 전부였다.
페이스 언니한테서도 편지가 왔다. 영국에서 자원봉사 간호 일을 하고 있는데 희망에 넘치고 밝은 편지를 보내왔다. 페이스 언니는 만족스럽게 지내고 있는 듯했다. 젬 오빠가 지난번 휴가를 받았을 때 만났고, 만일 젬 오빠가 부상이라도 입을 경우에는 가까이 있어서 오빠 곁으로 달려갈 수 있어 아주 큰 위로가 된다고 했다.
아, 나도 페이스 언니와 함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내가 할 일은 이 집에 있다. 내가 엄마를 두고 떠난다면 월터 오빠가 좋아할 리 없다. 나는 일상생활 가운데서, 아주 작고 사소한 일에서도 오빠와 한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월터 오빠는 캐나다를 위해 죽었다. 나는 캐나다를 위해 살아야만 한다. 그것이 오빠의 바람이었다.

1918년 1월 28일

“폭풍우에 흔들리는 마음은 영국 함대에 맡겨두고 밀기울 비스킷이나 만들어야겠어.”
수잔 아줌마가 소피아 아줌마에게 말했다.
소피아 아줌마는 독일이 새로 개발한 무적의 잠수함을 진수시켰다는 기분 나쁜 이야기를 듣고 왔다. 그러나 수잔 아줌마는 지금 그 문제보다도 요리에 대한 규제로 기분이 좋지 못했다. 연방 정부에 아줌마의 충성심은 지금 크게 시험받고 있는 중이다. 처음에는 이런저런 요청에 아줌마도 불만 없이 따랐다. 밀가루에 규제가 내려졌을 때도 아줌마는 기운차게 말했다.
“나 같은 늙은이가 새로운 재주를 배우는 것이 힘들지만 흉악한 독일 놈들을 쓰러뜨리는 데 도움이 된다면 전시 빵 만드는 법을 배워보지요.”
그러나 그 뒤의 규제는 아줌마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아빠가 엄히 금하고 있는 일이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아줌마는 로버트 보든 경을 경멸하는 말을 했을 것이다.
“흙도 없이 벽돌을 어떻게 만들어요, 사모님! 버터나 설탕도 없이 무엇으로 케이크를 만들 수 있겠어요? 만들 수가 없다고요. 케이크다운 케이크는 말이에요. 뭐, 판자때기 같은 케이크야 만들 수 있겠지요, 사모님. 더구나 거기에 설탕 옷을 약간 입히는 것조차도 금하다니요! 오타와 정부가 내 부엌까지 쳐들어와서 나한테 식료품을 배급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어요.”
아줌마는 국왕과 나라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마지막 피라도 내줄 사람이었지만, 애지중지하는 자기의 요리법을 포기하라니 정말이지 힘든 일이었고 심각한 문제였다.

낸 언니와 다이 언니한테서도 편지를 받았다. 아니, 쪽지를 받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둘 다 너무 바빠서 편지 쓸 겨를도 없다고 했다. 시험이 코앞에 다가왔기 때문이란다. 둘은 올봄에 문과대학을 졸업한다. 나는 분명 이 집안의 열등아다. 그렇지만 난 한 번도 대학생활을 동경한 일이 없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대학에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난 너무 야망이 없는 사람인 것 같아 걱정스럽기도 하다. 내가 되고 싶은 것은 단 한 가지다. 내가 그리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다. 만일 될 수 없다면 난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난 그것을 이 일기장에 적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것을 생각하는 거야 괜찮겠지만 소피아 아줌마 말대로 그것을 글로 쓰는 일은 너무 뻔뻔스러운 일이 될 것 같다.
아니, 써버리자. 난 인습이나 소피아 아줌마가 무서워 움츠러들고 싶진 않다! 나는 케네스 포드의 아내가 되고 싶다! 정말 써버렸다!
그 말을 일기장에 쓰고 거울을 보았지만 얼굴이 붉어진 흔적은 전혀 없다. 나는 제대로 교육받은 규수가 아닌 모양이다.
오늘 먼데이를 보고 왔다. 먼데이는 몸도 뻣뻣해졌고 류머티즘에 걸렸지만 그래도 여전히 역 승강장에 앉아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꼬리를 탁탁 치며 탄원하듯 내 눈을 바라보았다. 그 눈은 내게 ‘젬은 언제 돌아와요?’ 하고 묻는 듯했다. 아, 먼데이. 그 질문에는 아무도 대답할 수 없단다. 또 우리 모두가 묻고 묻는 질문인 ‘독일군이 다시 서부전선을 공격하면 어떻게 될까?’ 하는 질문에도 대답할 수가 없구나.


1918년 3월 1일

오늘 올리버 선생님이 말했다.
“올봄에는 또 무슨 일이 일어날까? 봄이 오는 것이 이렇게 두려웠던 적은 없었어. 공포감을 느끼지 않고 살 수 있는 날이 다시 올 거라고 생각하니? 우리가 두려움 속에서 잠들고 두려움으로 잠이 깬 지도 벌써 4년이야. 두려움은 식사할 때도, 초대하지 않아도 모든 모임마다 찾아들었지.”
소피아 아줌마는 한숨지었다.
“힌덴부르크는 4월 1일에 파리를 점령할 거라고 했어.”
“힌덴부르크라고! 그 사람이 4월 1일이 무슨 날인지 잊은 모양이지.”
그 이름을 말하는 수잔 아줌마의 어조에 깃든 경멸은 글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힌덴부르크는 지금까지 자기가 한 말대로 다 했어요.”
올리버 선생님이 소피아 아줌마만큼이나 음울하게 말했다.
“그래요. 러시아군이나 루마니아군을 상대로 싸운 경우에는요. 영국군이나 프랑스군을 맞아서 싸우면 어떻게 되는지 기다려보라고요. 미국군은 말할 것도 없고요. 미국군은 지금 전속력으로 거기로 가고 있어요. 가서 본때를 보여줄 거라고요.”
아줌마가 반박했다.
“아줌마는 몬스 전투 전에도 그런 말을 했잖아요.”
내가 말했다.
“힌덴부르크는 백만 병사의 목숨을 희생해서라도 연합군 전선을 돌파하겠다고 호언장담하고 있어요. 그만한 희생이면 그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지 않겠어요. 결국은 그가 패배하게 될 거라고 해도 어떻게 우리가 독일군을 물리칠 때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몸을 웅크린 채 독일군을 쳐부술 공격이 시작되기만 기다리고 있던 지난 두 달이 전쟁이 계속되던 세월을 다 합친 것만큼 길게 느껴졌어요. 난 낮이면 미친 듯이 일에 몰두하고 새벽 3시면 잠이 깨서 철의 군단이 드디어 공격을 시작했을까 생각했어요. 난 새벽 3시라는 시간은 없었으면 좋겠어요. 그 시간이면 힌덴부르크가 파리에 입성한 것이 보이고, 독일이 승리의 함성을 지르는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거든요. 그 저주스러운 시간이 아니면 독일이 승리를 거둔 모습 같은 건 보이지 않는데 말이에요.”
올리버 선생님이 말했다.
아줌마는 올리버 선생님의 곱지 못한 말에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마법의 묘약을 먹고 한 석 달쯤 잠자다 깨어나면 아마겟돈이 끝나 있었으면 좋겠어요.”
엄마도 참을 수 없다는 듯 초조하게 말했다.
엄마가 슬럼프에 빠져 그런 말을 하는 일은, 적어도 그런 말을 입 밖에 내는 일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엄마는 월터 오빠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9월 이후로 많이 변했다. 그렇지만 언제나 인내심을 갖고 씩씩하게 지내왔다. 그런 엄마까지도 이젠 인내심이 바닥난 것 같다.
아줌마는 엄마에게 다가가 어깨에 손을 얹고 말했다.
“걱정하지도, 실망하지도 마세요, 사모님. 나도 어젯밤에는 좀 낙담스러운 기분에 빠졌어요. 그래서 자리에서 일어나 등불을 켜고 성경을 읽었답니다. 성경을 딱 펼쳤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띈 구절이 무엇이었는지 아세요? ‘그들이 너를 치나 너를 이기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36)였답니다. 나는 미스 올리버처럼 앞날을 예견하는 꿈을 꾸는 힘 같은 것은 없지만, 이것이야말로 분명 하느님의 인도이시고, 힌덴부르크는 결코 파리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그만 성경책을 덮고 잠자리에 들어가 아침까지 잘 잤답니다. 새벽 3시건, 뭐 다른 저주스러운 시간이건 깨지도 않고요.”
나는 아줌마가 읽고 또 읽었다는 그 구절을 혼자서 중얼거려보았다. 만군의 주가 우리와 함께하니, 우리는 두려움을 모르고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서부전선에 진을 친 천군만마 독일군이라도 그런 정신으로 무장한 우리를 무너뜨리지는 못하리라. 그런 생각을 하자 힘이 났다. 하지만 올리버 선생님처럼 금방 또 더 이상은 폭풍 전야 같은 이 끔찍하고 불길한 시간을 견디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1918년 3월 23일

드디어 ‘최후의 결전’ 아마겟돈은 시작되었다! 이것이 정녕 최후의 결전일까? 어제 나는 우편물을 가지러 우체국에 갔다. 음산하고 추운 날씨였다. 눈은 녹았지만 생기라고는 없는 잿빛 대지는 꽁꽁 얼어붙었고 살을 에는 듯한 차가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글렌 마을은 어디를 보나 암울하고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드디어 커다란 검은 표제가 실린 신문을 받아 들었다. 21일에 독일이 공격을 감행했다. 독일은 병기와 포로를 대량으로 포획했다고 주장한다. 헤이그 장군은 ‘격전이 계속되고 있다.’고 했다. 난 그 마지막 말이 왠지 싫었다.
우리는 사고를 요하는 일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래서 모두들 뜨개질에만 열중했다. 뜨개질은 기계적인 손놀림 하나면 충분하다. 끔찍한 기다림은 이제 끝났다. 언제 어디에 무시무시한 공격이 떨어질지 전전긍긍하던 불안은 가셨다. 공격은 시작되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우리를 무너뜨리지는 못하리라!
오늘 밤 내 방에서 이렇게 일기장을 앞에 놓고 일기를 쓰는 동안 서부전선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짐스는 아기 침대에 잠들어 있고, 바람은 창문 언저리를 맴돌며 구슬프게 울부짖고 있다. 내 책상 위에 걸린 사진에서 월터 오빠는 그 아름다운 깊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오빠 사진과 나란히 오빠가 집에서 지낸 마지막 크리스마스 날에 내게 준 모나리자 그림도 걸려 있다. 그리고 또 그 옆에는 오빠의 시 <피리 부는 사나이>를 적은 액자도 걸려 있다. 내 귀에 오빠가 그 시를 낭송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그 시에는 오빠의 영혼이 담겨 있고, 그 시를 통해 오빠는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월터의 이름은 영원히 남을 것이다. 내 주변의 모든 것이 고요하고 평화롭고 다정하다. 월터 오빠가 아주 가까이 있는 것 같다. 흔들리는 안개 같은 베일을 살짝 걷으면 오빠의 모습이 보일 것만 같다. 오빠가 쿠르셀레트 전투가 있기 전날 밤 피리 부는 사나이를 본 것처럼.
오늘 밤 프랑스의 전선은 무사할 수 있을까?


34. 캐나다 정치가. 제1차 세계대전 때 캐나다 총리를 지냄.
35.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장군, 나중에 캐나다 총독을 지내기도 함.
36. 예레미아 1장 19절.



28
암흑의 일요일






은총의 해인 1918년 3월의 어느 한 주 동안에 고통이 한꺼번에 몰아닥쳤다. 그렇게 한 주 동안 고통스러운 소식이 연이어 밀어닥친 일은 전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던 일이었다. 그 주일 중 하루는 온 인류가 마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같은 고통을 당했고, 지구 전체가 몸을 뒤틀며 고통에 신음했다. 그야말로 세상 모든 이가 두려움에 떨었다.
‘잉글사이드’의 새벽은 차갑고 음산하게 밝아왔다. 블라이드 부인과 릴라 그리고 미스 올리버는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고 희망과 확신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며 교회에 갈 준비를 했다. 블라이드 의사는 윗마을 마우드 씨 집에 왕진을 가서 없었다. 마우드 씨 집에서는 가여운 전쟁 신부가 이 세상에 죽음이 아닌 생명을 탄생시키려고 용맹스럽게 싸우고 있었다. 수잔은 오늘 집에 있겠다고 했다. 수잔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온 것은 거의 처음이었다.
“오늘은 교회에 가고 싶지 않아요, 사모님. 구레나룻 난 보름달이 아주 믿음이 깊은 척, 흡족한 얼굴로 앉아 있는 꼴은 절대 못 봐요. 그 사람은 흉악한 독일군이 승리했다는 소식만 들려오면 꼭 그런 얼굴로 나와 앉아있잖아요. 내가 그 인간에게 성경책이나 찬송가를 내던지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어요. 인내심과 분별력을 잃어버리고 그런 짓을 하는 날에는 내 자신도, 신성한 성전도 다 더럽히는 꼴이 되잖아요. 그러니 난 집에 있어야 해요, 사모님. 집에서 얼른 전세가 역전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을 거예요.”
“나도 오늘은 그냥 집에 있을 걸 그랬나 봐. 교회에 앉아서 좋은 말씀을 들으면 뭐 해. 내 머릿속에는 우리 전선이 무너지지나 않았을까 하는 걱정뿐일 텐데.”
얼어붙은 붉은 길을 걸어가면서 미스 올리버도 릴라에게 말했다.
“다음 주 일요일이 부활절이에요. 이 전쟁이 우리들의 삶에 죽음을 불러올까요, 아니면 생명을 불러올까요?”
릴라가 말했다.
그날 아침 메러디스 목사는 ‘마지막까지 참는 자는 구함을 받으리라.’라는 말씀으로 설교를 했다. 신의 계시를 받기나 한 양, 목사가 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는 희망과 확신이 담겨 있었다. 릴라는 ‘잉글사이드’ 신도석 벽에 장식된 ‘월터 커스버트 블라이드의 영전에 바치노라’라고 쓰인 위패를 바라보며 두려움이 사라지고 새로운 용기가 솟아오름을 느꼈다. 월터가 아무런 가치도 없이 목숨을 잃었을 리 없다. 미래를 예견하는 환상을 보고는 했던 월터는 분명 승리를 예언했다. 릴라도 그 믿음을 놓지 않을 것이다. 그 끈을 꼭 붙들고 있을 것이다.
교회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는 릴라의 어둡기만 했던 기분은 사라지고 거의 들뜬 기분이 되어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희망을 갖고, 모두들 웃는 얼굴로 ‘잉글사이드’로 들어갔다. 거실에는 소파에 깊이 잠든 짐스와 난로 앞 깔개 위에 ‘무섭도록 조용히’ 꿈쩍도 않고 앉아 있는 박사를 빼놓고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고양이는 험악한 하이드 씨가 되어 있었다. 식당에는 아무도 없었고, 식탁에는 식사 준비조차 되어 있지 않았다. 아줌마는 어디 갔을까?
“병이라도 났나? 오늘 교회에 가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싶었는데.”
블라이드 부인은 걱정되어 말했다.
부엌문이 열리면서 수잔이 사색이 된 얼굴로 튀어나오는 바람에 블라이드 부인은 깜짝 놀랐다.
“수잔, 무슨 일이에요?”
“영국군 전선은 무너졌고, 독일군의 포탄이 파리에 떨어졌답니다.”
아줌마가 맥없이 대답했다.
세 사람은 멍하니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아니에요, 그럴 리 없어요.”
릴라가 겨우 소리를 내 말했다.
“세상 돌아가는 일이 무척이나 우습군요.”
거트루드 올리버가 말하고는 괴기하게 웃었다.
“수잔, 누가 그런 말을 했지요? 그 소식 언제 들었어요?”
블라이드 부인이 물었다.
“30분 전에 샬럿타운에서 장거리 전화가 왔어요. 어젯밤 늦게 도착한 소식이래요. 홀랜드 의사가 전화를 했더라고요. 모두 사실이래요. 그 말을 듣고 난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어요, 사모님. 점심도 준비하지 못해 죄송해요. 내가 이렇게 무기력해져 버리기는 처음 있는 일이네요. 잠시만 참아주신다면 금방 먹을 것을 만들어보지요. 그런데 감자도 태워버렸어요.”
“점심이라고요! 이 상황에 어떻게 점심을 먹겠어요, 아줌마. 오, 믿을 수 없는 일이야. 이건 틀림없이 악몽일 거야.”
블라이드 부인은 격렬하게 말했다.
“파리가 함락되었으면 프랑스를 잃은 거고, 전쟁은 진 거야.”
릴라가 중얼거렸다. 희망도, 자신감도, 믿음도 모두 잃어버린 기분이었다.
“오, 하느님! 오, 하느님!”
거트루드 올리버는 두 손을 붙들고 방 안을 서성이며 신음했다.
그 소리 외에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고대로부터 인간의 능력으로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을 때 그 극단적인 고통에서 나오는 외침과 탄원의 소리인 ‘오, 하느님!’ 소리 외에 달리 무슨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느님이 죽었어? 오, 윌라. 오, 윌라. 하느님이 죽어버렸어?”
짐스가 거실 문 앞에서 몹시 놀란 듯 물었다. 잠에서 막 깨어나 얼굴이 발그레해진 짐스가 큰 갈색 눈에 두려움을 가득 담고 서 있었다.
미스 올리버가 서성이던 발걸음을 멈추고 놀라 짐스를 바라보았다. 겁에 질린 짐스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릴라가 얼른 뛰어가 짐스를 달랬다. 의자에 축 늘어져 앉아 있던 수잔도 벌떡 일어났다.
수잔이 갑자기 냉정을 되찾고 분명하게 말했다.
“아니야, 하느님은 죽지 않았어. 로이드 조지도 마찬가지고. 우리가 그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어요, 사모님. 울지 마라, 키치너야. 상황이 나쁘긴 해도 더 나쁜 경우도 있을 수 있어. 영국군 전선이 무너졌다고 해서 영국 해군이 진 것은 아니라고. 내 장담해. 내가 힘을 내서 간단히 때울 것이라도 좀 만들어보지요. 모두들 기운을 차려야 해요.”
모두들 수잔이 준비한 것으로 간단히 한 끼를 때웠다. 하지만 모두들 먹는 시늉만 할 뿐 진짜로 먹을 수는 없었“독일군이 파리를 폭격했대요.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놈들이 짓밟지 않은 곳이 없을 거예요. 아니, 희망은 없어요. 우리는 졌어요. 그 옛날 패배한 사람들이 받아들였듯 우리도 그 사실을 받아들여야 해요. 독일군과 대항해 싸웠던 모든 나라들은 최선을 다했고 더 이상 용감할 수 없을 만큼 용맹스럽게 싸웠어요. 그래도 지고 말았어요. 과거에 패배를 경험한 사람이 어디 한둘인가요. 이제 우리도 그중 하나가 되었을 뿐이에요.”
미스 올리버가 쓰디쓰게 말했다.
“나는 그렇게 단념해버리지 않을 거예요. 희망을 버리지 않을 거라고요. 우리는 무너지지 않았어요. 아니에요. 독일이 프랑스 전체를 함락시켰다고 해도 우리는 정복된 게 아니에요. 나는 이렇게 절망해 있었던 것이 부끄러워요. 다시는 그렇게 낙심해 있지 않을 거예요. 당장 시내로 전화해서 자세한 상황을 알아봐야겠어요.”
릴라가 외쳤다. 파리했던 릴라의 얼굴이 흥분으로 붉어졌다.
그러나 장거리 전화 교환수는 나라 전체에서 혼비백산한 사람들이 걸어대는 전화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릴라는 전화 걸기를 단념하고 살그머니 집을 빠져나와 ‘무지개 골짜기’로 갔다. 월터와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던 작은 구석지를 찾아 시들어 잿빛이 된 풀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끼가 낀 쓰러진 나무 기둥에 머리를 기대고 그대로 엎드려 기도를 올렸다. 해가 검은 구름을 뚫고 나왔고 골짜기는 옅은 황금빛 장관을 이루었다. ‘연인 나무’에 매달린 종이 쨍그랑쨍그랑 요정 같은 소리를 내면서 어디선가 갑자기 불어온 3월의 바람을 타고 퍼져 나갔다.
“오, 하느님, 저에게 힘을 주세요. 힘과 용기를 주세요.”다. ‘잉글사이드’의 누구도 그 암울한 저녁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거트루드 올리버는 마루를 서성였다. 암울한 패배 소식의 충격에서 벗어난 수잔을 빼고는 모두가 안절부절못하고 서성였다.
“사모님, 난 일요일이지만 뜨개질을 해야겠어요. 전에는 그런 일을 생각도 못 했지만요. 제3계명을 어기는 일이니까요. 하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오늘은 뜨개질을 하지 않을 수 없어요. 가만히 있다가는 미쳐버릴 것 같으니까요.”
“할 수만 있으면 해요, 수잔. 나도 뜨개질이라도 할 수만 있으면 할 거예요. 하지만 난 할 수 없어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블라이드 부인이 초조하게 말했다.
“아직 우리가 모르는 일도 있을 거예요. 상황을 전부 알게 되면 뭔가 힘이 나는 소식도 듣게 될지 모른다고요.”
릴라가 신음하듯 말했다.

“독일군이 파리를 폭격했대요.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놈들이 짓밟지 않은 곳이 없을 거예요. 아니, 희망은 없어요. 우리는 졌어요. 그 옛날 패배한 사람들이 받아들였듯 우리도 그 사실을 받아들여야 해요. 독일군과 대항해 싸웠던 모든 나라들은 최선을 다했고 더 이상 용감할 수 없을 만큼 용맹스럽게 싸웠어요. 그래도 지고 말았어요. 과거에 패배를 경험한 사람이 어디 한둘인가요. 이제 우리도 그중 하나가 되었을 뿐이에요.”
미스 올리버가 쓰디쓰게 말했다.
“나는 그렇게 단념해버리지 않을 거예요. 희망을 버리지 않을 거라고요. 우리는 무너지지 않았어요. 아니에요. 독일이 프랑스 전체를 함락시켰다고 해도 우리는 정복된 게 아니에요. 나는 이렇게 절망해 있었던 것이 부끄러워요. 다시는 그렇게 낙심해 있지 않을 거예요. 당장 시내로 전화해서 자세한 상황을 알아봐야겠어요.”
릴라가 외쳤다. 파리했던 릴라의 얼굴이 흥분으로 붉어졌다.
그러나 장거리 전화 교환수는 나라 전체에서 혼비백산한 사람들이 걸어대는 전화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릴라는 전화 걸기를 단념하고 살그머니 집을 빠져나와 ‘무지개 골짜기’로 갔다. 월터와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던 작은 구석지를 찾아 시들어 잿빛이 된 풀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끼가 낀 쓰러진 나무 기둥에 머리를 기대고 그대로 엎드려 기도를 올렸다. 해가 검은 구름을 뚫고 나왔고 골짜기는 옅은 황금빛 장관을 이루었다. ‘연인 나무’에 매달린 종이 쨍그랑쨍그랑 요정 같은 소리를 내면서 어디선가 갑자기 불어온 3월의 바람을 타고 퍼져 나갔다.
“오, 하느님, 저에게 힘을 주세요. 힘과 용기를 주세요.”

릴라는 중얼거렸다. 그런 다음 짐스가 그러는 것처럼 두 손을 마주 잡고 아이처럼 말했다.
“제발, 내일은 더 좋은 소식을 전해주세요.”
거기서 그렇게 오랫동안 무릎을 꿇고 있다가 ‘잉글사이드’로 돌아왔을 때 릴라는 마음을 단단히 다시 가다듬고 차분해져 있었다. 블라이드 의사도 집으로 돌아왔다. 피곤해 보이긴 했지만 힘이 넘쳐 보였다. 다행히 더글러스 헤이그 마우드 아기가 무사히 세상에 발을 들여놓았기 때문이었다. 미스 올리버는 여전히 초조하게 서성거렸으나 블라이드 부인과 수잔은 충격에서 벗어나 있었다. 수잔은 이미 다른 해협 항구로 가 새로운 방어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이런 항구들을 확보하기만 하면 사태를 헤쳐 나갈 수 있어요. 파리는 사실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도 아니에요.”
미스 올리버가 수잔이 자기에게 덤벼들기라도 한 듯 날카롭게 말했다.
“그 소리는 제발 그만둬요.”
거트루드 올리버에게는 상황이 나빠질 때면 언제나 듣게 되는 그 ‘군사적으로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오히려 참기 어려운 절망의 소리로 들렸다.
“우리 전선이 무너졌다는 말은 마우드네 집에서 들었지만 독일군이 파리를 포격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아. 우리 전선이 함락되었다 해도 파리는 최전방에서 아무리 가까워도 80킬로미터는 될 텐데 그리 쉽게 파리까지 진격할 수는 없을 거라고. 내 말을 믿어요. 우리가 들은 말이 전부 사실은 아닐 거야. 내가 직접 시내로 장거리 전화를 걸어 알아봐야겠어.”

블라이드 의사가 말했다.
블라이드 의사도 릴라와 마찬가지로 장거리 전화를 걸 수는 없었지만 의사가 한 말만으로도 모두 얼마쯤 마음이 밝아져 그럭저럭 그날 저녁 시간을 견딜 수 있었다. 9시경에 가까스로 장거리 전화가 걸려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어서 그날 밤 간신히 잠을 이룰 수는 있었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블라이드 의사는 말했다.
“전선은 생캉탱 한 군데만 뚫렸대요. 영국군은 정연하게 퇴각하고 있는 모양이에요. 그리 나쁜 소식은 아니에요. 파리에 떨어졌다는 포탄은 파리에서 70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이었대요. 독일군이 엄청나게 먼 거리에서 쏠 수 있는 총기를 발명했다고 하는데, 그 무기로 공격했다나 봐요. 이게 다예요. 믿을 만한 홀랜드 선생님의 말이에요.”
“어제 들었더라면 그것도 견딜 수 없는 소식이었겠지만 오늘 아침에 들은 소식보다 좋은 소식이라고 감사라도 하고 싶네요.”
미스 올리버가 웃는 얼굴을 보이려고 애쓰며 말하고는 덧붙였다. “그래도 전 여전히 너무 걱정되어 오늘 밤에도 잠을 못 잘 것 같아요.”
“어쨌거나 감사해야 할 일이 또 하나 있네요, 미스 올리버. 오늘은 소피아가 오지 않았다는 거예요. 오늘 일어난 어떤 일보다도 소피아가 여기 있었다면 난 견디지 못했을 거예요.”
수잔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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