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전화

붉은 손가락/히가시노 게이고 (1)

개미남 | 2019.06.21 15:01:45 댓글: 0 조회: 232 추천: 0
분류추리소설 https://file.moyiza.com/fiction/3941367
붉은 손가락/히가시노 게이고




1.
저녁 식사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 다카마사는 아까 그 카스텔라가 먹고 싶다고 했다. 마쓰미야가 선물로 들고 간 카스텔라였다.
"이런 시간에 간식을 먹어도 괜찮아?" 마쓰미야는 종이봉투를 집어 들며 물었다.
"알 게 뭐냐? 배고프면 먹는다. 그게 몸에 제일 좋은 법이야."
"난 몰라요. 간호사한테 혼나도."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연로한 외삼촌이 그나마 식욕을 보여준 게 마쓰미야는 반가웠다.
종이봉투에서 상자를 꺼내 뚜껑을 열었다. 한입 크기의 카스텔라가 하나씩 포장되어 있었다. 그중 한 개의 포장을 벗겨 마쓰미야는 다카마사의 바짝 여윈 손에 건네주었다.
다카마사가 다른 한쪽 손으로 베개를 움직여 고개를 들려고 해서 마쓰미야는 얼른 다가서서 거들어주었다.
보통 어른이라면 두 입에 다 먹어버릴 카스텔라를 다카마사는 시간을 들여 조금씩 조금씩 입에 넣었다. 삼킬 때 약간 힘들어 보였지만 그래도 달콤한 맛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차는?"
"응. 좀 마시자."
마쓰미야는 곁의 카트에 얹혀 있던 페트병을 외삼촌에게 건네주었다. 거기에는 스트로가 꽂혀 있었다. 다카마사는 자리에 누운 채로 능숙하게 차를 마셨다.
"열은 좀 어때?" 마쓰미야가 물었다.
"노상 똑같아. 37도에서 38도 사이를 오락가락. 벌써 익숙해졌다. 그게 내 평상 체온이라고 생각하기로 했어."
"뭐. 아무렇지도 않다면 다행이지만 그래도‥‥‥."
"그보다 슈헤이 너. 이런 데 와 있어도 괜찮아? 일은 좀 어때. 잘하냐?"
"지난번 세타가야 쪽 사건이 정리되면서 요즘은 외려 한가한 평이야."
"그렇게 한가할 때 승진시험 공부라도 해두는 게 어때?"
"또 그 얘기야?" 마쓰미야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얼굴을 찌푸렸다.
"공부하기 싫으면 차라리 여자하고 데이트하든지 해야지. 병원은 왜 자꾸 들락거려? 내 걱정은 하지 마라. 나는 그냥 내버려 두면 왜. 가츠코도 노상 오는데, 뭐."
가츠코는 마쓰미야의 어머니이자 다카마사의 여동생이기도 했다.
"내가 데이트할 여자가 어딨어? 게다가 외삼촌 심심하잖아?"
"아니, 그렇지도 않아. 내가 이래 봬도 이래저래 궁리할 게 많다고."
"이거?" 마쓰미야는 카트 위에 놓여 있는 보드를 집어 들었다. 장기판인데 장기 말이 자석으로 딱 붙게 되어 있었다.
"장기 말에는 손대지 마라. 한참 대국하는 중이야."
"나는 장기는 잘 모르지만 이거. 전에 봤을 때하고 별로 달라진 게 없는 거 같은데?"
"그럴 리가 있냐? 시시각각 전황이 변하고 있어. 상대가 제법 고수라서 말이지."
다카마사가 그렇게 말했을 때 병실 문이 열리고 간호사가 들어왔다. 서른 살 남짓으로 보이는, 둥그스름한 얼굴의 여자였다.
"체온하고 혈압 좀 측정할게요." 그녀는 말했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만. 지금 얘한테 장기판 보여주던 참이야."
다카마사의 말에 둥근 얼굴의 간호사는 미소를 지었다.
"말 놓을 자리. 정했어?"
"네. 물론이죠." 그렇게 말하더니 그녀는 마쓰미야가 들고 있는 장기판에 손을 내밀어 말 하나를 움직였다.
마쓰미야는 깜짝 놀라서 외삼촌과 그녀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엣. 간호사님이?"
"음. 대단한 강적이야. 얘. 그 장기판, 조금만 더 가까이 보여줘."
마쓰미야는 장기판을 들고 침대 옆으로 다가섰다. 판을 쓰윽 들여다보는 다카마사의 얼굴이 자못 심각했다. 자잘한 주름들이 한층 더 깊어졌다.
"역시 만만치 않은데? 마馬로 치고 나왔어. 흠, 그런 수가 있었군."
"장기 고민은 나중에 하세요. 혈압 올라가니까요."
그녀는 능숙하게 체온과 혈압을 측정했다. 가네모리라고 적힌 이름표를 가슴에 달고 있었다. 이름이 도키코라는 건 나중에 다카미사가 알려주었다. 마쓰미야보다 나이는 좀 많지만, 데이트 한 번 해보는 게 어떠냐고 물어왔었다. 물론 마쓰미야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녀 쪽에서도 그런 마음은 없을 터였다.
"어디 아픈 데는 없으세요?" 측정을 마치고 나서 그녀는 다카마사에게 물었다.
"아니, 없어. 모두 다른 때하고 똑같아."
"그럼. 뭔가 문제가 생기면 곧바로 불러주세요." 가네모리 도키코는 웃는 얼굴로 병실을 나갔다.
그 모습을 눈으로 배웅하자마자 다카마사는 다시 장기판으로 눈을 돌렸다.
"이런 수를 들고나왔다 이거지? 예상을 못 했던 건 아니지만 좀 의외로군."
이런 식이라면 분명 심심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마쓰미야는 적잖이 안심되어 의자에서 일어섰다.
"자. 나도 슬슬 갈게요."
"응. 네 엄마에게 인사 전해라."
마쓰미야가 방을 나서려고 문을 열었을 때 "얘. 슈헤이." 하고 다카마사가 그를 불러 세웠다.
"응?"
"‥‥‥ 정말 이제는 무리해가면서 찾아올 거 없어. 너는 여기 오는 거 말고도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을 텐데."
"아이참. 무리해서 오는 거 아니라니까."
"또 올게요." 말을 남기고 마쓰미야는 병실을 뒤로했다.
마쓰미야는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도중에 너스 스테이션에 들러 보았다. 가네모리 도키코의 모습이 눈에 띄어서 슬쩍 손짓으로 불렀다. 무슨 일이냐는 얼굴로 그녀가 다가왔다.
"외삼촌한테 요즘 누군가 병문안 온 사람이 있었습니까? 우리 어머니 말고 다른 사람으로요."
어머니 가츠코에 대해서는 당연히 간호사들이 다 알고 있을 터였다.
가네모리 도키코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제가 아는 한에서는 아무도 온 사람이 없었는데?"
"혹시 사촌 형이 안 왔나요? 외삼촌의 큰아들인데."
"아드님? 아뇨. 안 오셨던 거 같아요."
"그래요‥‥‥. 네. 바쁘신데 죄송했습니다."
"아뇨." 그녀는 미소를 짓고 일하던 곳으로 돌아갔다.
엘리베이터에 탄 뒤 마쓰미야는 한숨을 내쉬었다. 무력감이 엄습하면서 마음이 답답했다. 이대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단 말인가. 은근히 화가 나기도 했다.
외삼촌 다카마사의 누렇게 탁해진 얼굴이 떠올랐다. 그의 담낭과 간장은 암에 걸려 있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그런 사실을 알지 못했다. 담당 의사는 다카마사에게 단순한 담관염이라고 설명해주었을 터였다. 수술로 암세포를 떼어내는 건 이미 불가능하고 이제는 그저 최대한의 연명 조치만 하는 데 지나지 않았다. 환자 본인이 지독한 통증을 호소했을 경우에 모르핀을 쓰는 것에 대해서는 마쓰미야도 가츠코도 함께 동의했다. 최소한 고통이라도 없이 세상을 떠나게 해주고 싶다는 게 두 사람의 공통된 마음이었다.
그날이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었다. 의사의 말에 따르면, 내일 당장 닥친다 해도 이상하지 않다고 했다. 외삼촌과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도저히 그렇게까지 위중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한계 시간은 분명 재깍재깍 다가오고 있었다.
마쓰미야가 외삼촌인 가가 다카마사를 만난 것은 중학교에 입학하기 직전이었다. 그때까지 마쓰미야는 어머니인 가츠코와 둘이 다카사키에서 살았다. 어째서 도쿄로 이사를 오게 되었는지. 그때 그는 잘 알 수 없었다. 어머니의 회사 일 때문이라는 이야기만 들었다.
처음으로 외삼촌 다카마사를 소개받았을 때는 깜짝 놀랐었다. 자신들에게 이렇게 가까운 친척이 있다는 사실을 그때까지 까맣게 몰랐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외동딸이고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는 벌써 오래전에 돌아가셨다. 그렇게만 생각하며 살아왔었다.
가가 다카마사는 예전에는 경찰관이었다. 퇴직한 후에는 경비회사 고문으로 일했다. 결코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을 텐데도 그는 외롭게 사는 여동생과 조카를 자주 찾아주었다. 딱히 볼일이 있어서라기보다 그저 어떻게 사는지 들여다보러 왔구나 하는 느낌이 들곤 했다. 그때마다 그는 잊지 않고 선물을 들고 왔다. 찹쌀떡이나 고기만두처럼, 한창 먹성 좋은 중학생이 좋아할 것들이 많았다. 푹푹 찌는 한여름에는 낑낑거리며 수박 한 통을 들고 온 일도 있었다.
마쓰미야가 의아하게 생각했던 것은 이렇게 친절하게 해주는 외삼촌과 어째서 지금까지는 전혀 왕래가 없었는가 하는 것이었다. 도쿄와 다카사키라면 서로 오가기가 어려운 거리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에 대해 어머니나 외삼촌에게 물어봐도 납득할 만한 설명은 해주지 않았다. 어쩌다 보니 서로 소원하게 지낸 것이라고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고등학교에 올라갈 때, 마쓰미야는 드디어 어머니에게서 그 대답을 듣게 되었다. 바로 호적등본 때문이었다. 아버지란이 빈칸이 되어 있었다. 그것을 어머니에게 캐물었더니, 전혀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마쓰미야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결혼하지 않았다. 마쓰미야라는 건 어머니가 이전에 결혼했던 사람의 성씨였다.
어머니와 마쓰미야의 친아버지가 결혼하지 못한 것은 아버지가 이미 다른 여자와 결혼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즉 두 사람의 관계는 세상에서 보통 말하는 '불륜'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단순한 바람이 아니었다. 아버지 쪽에서는 어떻게든 이혼을 하려고 했다.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자 살던 집을 나와 어머니와 함께 다카사키에서 살림을 차렸다. 아버지는 요리사였다.
얼마 뒤에 두 사람 사이에 아이가 생겼지만, 그 시점에서도 아버지의 이혼은 성립되지 않았다. 그래도 사람들 앞에서는 실질적인 부부처럼 생활했던 것인데, 이윽고 생각지도 못한 비극이 찾아왔다. 아버지가 사고로 목숨을 잃은 것이다. 근무하던 일본요릿집에서 화재가 일어났고 아버지는 거기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했다.
아직 어린 자식을 안고 어머니는 당장 먹고살 생활비를 벌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어머니가 물장사했다는 것을 마쓰미야는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한밤중 늦은 시간이 아니면 돌아오지 않았던 그녀는 늘 술에 취해 있었고 이따금 싱크대에서 토악질하곤 했다.
그런 모자에게 손을 내밀어준 사람이 외삼촌 가가 다카마사였다. 어머니는 다카사키의 주소를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지만, 오빠인 다카마사만은 여동생의 소재를 파악하고 있다가 이따금 연락해온 모양이었다.
다카마사는 누이 가츠코에게 도쿄로 돌아오라고 권했다. 그래야 자신이 돌봐주기 쉽다는 것이 이유였다. 가츠코는 오빠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지만, 아들의 장래를 생각하면 고집을 부리고 있을 상황이 아니라는 생각에 마음을 고쳐먹고 상경을 결심했다.
다카마사는 모자의 거처뿐만 아니라 가츠코가 일할 곳까지 찾아주었다. 거기다 생활비도 조금씩 도와준 모양이었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마쓰미야는 자신이 어떻게 남 못지않게 이만큼 살아올 수 있었는지 그제야 깨달았다. 모두가 여동생 모자를 염려해준 외삼촌의 착한 성품 덕분이었다.
이 사람만은 배신해서는 안 된다. 어떻게든 그 은혜를 갚아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마쓰미야는 학창 시절을 보냈다. 어렵사리 장학금을 받아가며 대학 진학을 결심했던 것도 다카마사가 그러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진로에 대해서는 망설임 없이 경찰관의 길을 선택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종사했던 직업이었다. 다른 직업 따위는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모진 병마에서 외삼촌의 목숨을 구할 수 없다면, 적어도 한이나 남기는 일 없이 세상을 떠나게 해주고 싶다는 것이 마쓰미야가 간절히 바라는 일이었다. 이것이 외삼촌 다카마사에게 마지막으로 은혜를 갚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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