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전화

유성의 인연/히가시노 게이고 (52)

개미남 | 2019.06.18 10:23:36 댓글: 0 조회: 158 추천: 0
분류추리소설 https://file.moyiza.com/fiction/3938997
유성의 인연/히가시노 게이고


2 - 27.

고이치가 이야기를 끝낸 뒤에도 다이스케와 시즈나는 침묵한 채였다. 여느 때처럼 두 사람은 침대 위에 있었다. 다이스케는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고 시즈나는 누워 있었다.
"사건의 진상은 그거야. 솔직히 말해서 나도 아직 혼란스러워. 하지만 어쨌든 전부 끝났어." 고이치는 두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너희들, 뭐라고 말 좀 해봐."
다이스케는 부루퉁한 얼굴이었다. 시즈나 역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고이치는 머리를 북북 긁었다. "나한테 뭐 불만 있냐?"
다이스케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형한테는 불만 없어."
"그럼 왜 아무 소리도 안 해?"
"할 말이 없어서 그래. 분명히 말해서 나는 가시와바라인지 뭔지 하는 형사도 잘 생각이 안 난다고. 형이야 가끔 만났는지 모르지만."
"가끔 만났으면서도 그자가 범인이라는 걸 눈치 채지 못했다고 화가 난 거야?"
"그런 거 아니라니까. 불만 같은 거 없다잖아. 그게 아니고 우리가 지금까지 대체 뭘 했나 싶어서 그래. 완전히 잘못 짚고서 마구 폭주했다고 생각하니까 뭔가 허탈하고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어."
"완전히 잘못 짚은 건 아니야. 이런저런 작전을 펼쳤기 때문에 도가미의 말을 끌어낼 수 있었어."
"도가미가 말을 한 건 유키나리가 도와줬기 때문이지. 그리고 유키나리가 우리를 도와주기로 마음먹은 건 시즈나를 좋아했기 때문이고. 시즈나를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다이스케의 얼굴에 베개가 날아왔다. 던진 건 물론 시즈나였다.
"크윽. 왜 이래!"
"작은오빠야말로 쓸데없는 소리 좀 하지 마."
"어라.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네가 화낼 이야기도 아니잖아?"
"시끄러. 그만하라니까!" 시즈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곁에 있던 핸드백을 들고 현관으로 향했다.
"어디 가는데?" 고이치가 물었다.
"그만 갈래."
"이제 다 이해한 거야?"
그러자 그녀는 구두를 신던 손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아버지 엄마가 살해된 일에 이해를 어떻게 해? 하지만 뭐, 어쩔 수도 없잖아? 그렇다면 한시바삐 잊어버리는 수밖에. 아마 절대 안 되겠지만." 그녀는 심통이 난 얼굴을 한 채 슬쩍 손을 흔들더니 문을 열고 나갔다.
고이치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긴 한숨을 쉬었다.
"형. 앞으로 어쩔 거야?" 다이스케가 물어왔다.
"어쩌다니, 뭘?"
"우리 살아가는 방식 말이야. 형이 전에 말했지? 이게 마지막이다. 이 일만 끝나면 사기일은 접겠다고."
고이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생각에 변함은 없어. 앞으로는 똑바로 살아갈 거야."
"그거 말인데, 나는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고 생각해."
"안 된다니, 뭐가 어떻게 안 되는데?"
"사건의 진상을 알고 나서 나, 이런 생각이 들었어. 아무리 아들을 위해서라지만 돈 때문에 남의 부모를 죽인 가시와바라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어. 그런 더러운 돈이였기 때문에 그 아들도 목숨을 건지지 못했을 거야. 남에게서 달취한 돈으로 내 행복을 잡겠다니, 그런 건 완전히 사기라고."
"다이스케, 너 혹시?"
"응. 나, 경찰에 가려고. 당당히 죄를 갚고 다시 시작할래. 그러지 않으면 속이 개운하지 않을 거 같아." 다이스케는 씨익 웃었다. "어허, 괜찮아. 나, 아직 젊잖아?"
고이치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다이스케가 그런 결정을 하기까지 참으로 많은 갈등이 있었을 것이다. 아마 지금 막 생각나서 하는 말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생각해온 것이리라. 동생의 고뇌를 알아차리지 못한 자신의 아둔함이 고이치는 미웠다.
"알았어. 나도 함께 간다."
"그건 안 돼. 자수는 나 혼자로도 충분해. 형은 피해자들에게 얼굴이 드러나지 않았어."
"야. 그런 문제가 아니지. 그리고 내가 너를 혼자 보낼 것 같냐? 나를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고이치의 말을 듣고 다이스케도 괴로운 듯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고이치는 말했다.
"둘 다 자수하게 되면 문제가 좀 남기는 한다만."
"응." 다이스케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즈나만은 반드시 지켜줘야지. 우리는 한 인연의 끈으로 묶인 사이잖아?"
"말 잘했어." 고이치는 대꾸했다.


새 테이블 클로스가 깔린 좌석에 앉아 유키나리는 초대장 문안을 점검했다. <도가미 정> 아자부쥬반 점의 개점일이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오늘 중으로 초대장을 발송할 예정이었다.
문장에 잘못된 것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때, "점장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라고 남자 스테프가 말을 건네왔다. "아리아케 씨라는 분인데요."
유키나리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응. 안내해줘요."
곧바로 검은 점퍼를 걸친 아리아케 고이치가 들어오더니 유키나리를 보고 인사를 건넸다.
"잘 오셨습니다. 들어와요." 유키나리는 맞은편 자리를 권했다. "커피와 홍차, 어느 쪽이 좋아요?"
"나는 괜찮습니다. 그보다 중요한 이야기가 있어요." 그의 어조는 딱딱하게 긴장되어 있었다.
"지난번보다 더 중요한 이야기?"
"어떤 의미에서는 그럴지도 모르지요." 고이치의 진지한 눈빛은 변하지 않았다.
"잠깐만." 그렇게 말하고 유키나리는 입구로 향했다. 남자 스태프가 청소하고 있었다.
"잠깐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해줘요."
"알겠습니다." 스태프의 대답을 듣고 유키나리는 테이블로 돌아왔다.
"사람을 물린 건 야자키 씨가 여기 왔던 이후로 처음이군요. 그때도 엄청난 이야기를 들었어요. 어쩐지 겁이 나는데?" 일단 풀었던 입가를 그는 다시 팽팽히 당겼다. "자, 할 이야기라는 건 뭐죠?"
고이치가 등을 꼿꼿이 세웠다.
"우선 꼭 사과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 있어요. 시즈나가 우리에게는 친여동생이나 다름없다는 이야기는 경찰에게 이미 들었을 테지만, 그 애가 원래 도가미 씨에게 접근했던 이유는 이번 사건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어요. 우리가 노린 건 원래 당신이었습니다."
"네?" 유키나리가 입을 떡 벌렸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우리는 당신에게서 돈을 갈취할 생각이었어요. 당신을 노린 건 단순히 부자였기 때문일 뿐입니다. 한마디로 우리는‥‥‥." 고이치는 심호흡을 하고 나서 말을 이었다. "사기꾼입니다. 그것도 상습적인."
"사기꾼‥‥‥?" 입 밖에 내보고서도 여전히 그 말의 의미를 파악하는 데 조금 시간이 걸렸다.
멍해져 있는 유키나리에게 고이치는 자신들이 해온 일, 유키나리에게 하려고 했던 일을 줄줄이 말하기 시작했다. 마치 물병에 뜷린 구멍에서 물이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유키나리가 말을 끼워넣을 틈도 없었다. 하긴 그런 틈이 있었다 해도 분명 그는 내내 입을 열지 못했을 것이다. 너무 놀란 나머지 소리마저 잃었다. 고이치의 입에서 나오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그저 멀거니 듣기만 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범죄자에요. 당당하게 살아갈 자격 같은 건 없습니다." 자신들의 소행을 다 이야기한 뒤에 고이치는 고뇌에 찬 표정을 보였다.
유키나리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 손의 안쪽은 땀에 젖어 있었다. 소리를 내기 전에 침을 꿀꺽 삼켰다. 호흡을 가다듬은 뒤, 드디어 바싹 마른 입을 열었다.
"지금 그 말이 모두 사실이에요?" 목소리가 약간 갈라져 있었다.
"사실입니다. 거짓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전부 사실이에요." 고이치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유키나리는 이마에 손을 짚었다. 심장의 고동에 맞추어 지끈지끈 둔한 두통이 찾아왔다.
"믿을 수가 없군요. 왜 그런 짓을‥‥‥."
"살기 위해서에요. 친지 하나 없고 아무런 힘도 없는 우리가 이 세상을 건너가기 위해서는 수단 따위를 선택하고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또 한 가지 변명하자면, 내 책임을 다하고 싶었어요. 맏형으로서의 내 책임을 말이죠. 물론 지금은 그게 어처구니없는 잘못이었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떤 이유가 되었건 동생들을 범죄자로 만들어서는 안 되었어요. 그러지 못하게 하는 게 형의 역할이었을 텐데 나는 정말 한심한 착각을 하고 있었어요." 가슴에 걸린 응어리를 토해내듯이 고이치는 말했다. 그 격렬한 말투는 스스로에 대한 분노에서 나오는 것 같았다.
"당신이 몹시 후회하고 있다는 게 느껴지는군요. 하지만 왜 그 이야기를 내게?"
그러자 고이치는 똑바로 유키나리의 눈을 응시해왔다.
"우리는 범죄자에요. 그러니 나와 동생은 자수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시즈나만은 구해주고 싶어요. 그 애는 아직 어린 아가씨고 그저 잠깐 장난하는 기분으로 우리와 함께 움직였을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자수한다는 걸 알면 틀림없이 자기도 함께 간다고 할 거예요."
유키나리는 눈을 깜빡였다.
"그렇겠지요, 그녀라면."
"절대로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나와 동생은 시즈나에 대해서만은 경찰에서도 절대 말하지 않기로 맹세했어요. 사기를 칠 때마다 매번 다른 여자를 아르바이트로 썼다고 말할 생각입니다. 하지만 그 아이가 제 발로 경찰에 가버리면 우리는 어떻게도 할 수가 없어요."
"그래도 내가 어떻게 해야 좋을지‥‥‥."
고이치는 갑자기 의자에서 내려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래서 오늘 찾아온 겁니다. 시즈나를 경찰에 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는 당신에게 기대는 수밖에 없어요. 그 애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어요. 당신이 설득한다면 그 애도 말을 들을 겁니다."
"그녀가 나를? 아니, 그럴 리가 없을 텐데요?"
"오랜 세월 함께 살아온 내가 하는 말이니 확실합니다. 동생도 같은 의견이예요. 그 애를 신부로 맞아들여달라든가,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단지 설득해주기만 하면 됩니다. 제발 부탁합니다!" 고이치는 몇 번이고 머리를 숙였다.
유키나리는 혼란스러웠다. 아리아케 형제와 시즈나가 사기를 쳤다는 사실에 마음이 뒤흔들렸고 시즈나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말에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런 속에서도 유키나리는 자신이 어떻게 해야 좋을지 열심히 생각해보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일어서려고 하지 않는 고이치를 바라보는 사이에 점차 마음이 침착해지는 것을 느꼈다. 친 혈육이 아니어도 이토록 깊고 강력하게 한마음으로 맺어진 세 사람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키나리에게 시즈나는 세상 그 어느 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렇다면 그녀가 사랑하는 아리아케 형제 역시 소중한 사람들인 것이다.
"그만 일어나요. 고이치 씨." 유키나리는 말했다.
고이치가 얼굴을 들었다. "내 부탁을 들어주는 겁니까?"
"알겠습니다." 유키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
"뭔데요?"
"한 가지 물건을 나한테 팔아주면 됩니다." 그렇게 말하고 유키나리는 미소를 지었다.


다카야마 히사노부는 차임벨 소리에 잠이 깨었다. 또 택배가 왔나, 생각하며 도어 스코프를 들여다봤더니 낯이 익은 남자가 양복 차림으로 서 있었다. 그게 누구인지 생각해내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는 문을 열었다.
"휴일 아침 시간에 정말 죄송합니다."
머리를 숙인 것은 미나미다 시호에게서 소개받은 산쿄은행의 고미야라는 남자였다. 그 뒤편에는 낯선 남자도 한 명 서 있었다.
"무슨 일이죠?" 다카야마는 잔뜩 경계하며 물었다.
"다카야마 씨께서 전에 유럽 금융공사의 미국 달러 채권을 계약하셨습니다만, 기억하고 계십니까?"
"물론 기억하고 있지요."
그러자 고미야는 몹시 황송하다는 듯 다시 한 번 깊숙이 머리를 숙였다.
"실은 요즘 유럽 금융공사가 몹시 미묘한 상황에 처해서요. 이대로 가다가는 미국 달러 채권이 부도 사태를 맞을 우려가 있습니다."
"에엥?" 다카야마는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젖혔다. "어째 그런 일이! 절대로 안전하다고 했잖아요? 그럼 내 돈은 어떻게 되는 거냐고요!"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고객의 돈은 물론 전액 돌려드리겠습니다. 실은 오늘 현금으로 들고 왔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이 자리에서 수속을 해주셨으면 합니다만."
고미야가 내민 두툼한 봉투 속을 들여다보고 다카미야는 숨을 헉 삼켰다. 만 엔짜리 지폐가 가득 차 있었다.
다카야마는 바닥에 무릎을 짚고 손끝에 침을 발라가며 지폐를 헤아렸다. 모두 합해 2백 장이나 되었다.
"내가 맡겼던 건 150만 엔인데?"
고미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후배 미나미다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그녀가 투자했던 50만 엔도 다카야마 씨에게 보내달라고 하더군요. 듣자하니 개인적으로 빌린 돈이라고 하던데요."
"아, 그, 그랬죠."
"이해가 되셨다면 여기 이쪽에 사인과 도장을." 고미야는 서류를 꺼내놓았다.
서류에는 뭔가 어려워 보이는 말들이 줄줄이 적혀 있었다. 하라는 대로 다카야마가 사인하고 도장을 찍어주자 은행원들은 만족스러운 듯 돌아갔다.
문을 걸어 잠근 뒤, 다카야마는 현금이 든 봉투를 바라보았다. 실은 내심 안도하고 있었다. 이 돈이 어찌 되려나 은근히 걱정하면서도 어떻게 해약해야 하는지 알지 못해 난처하던 참이었던 것이다.
더 이상 미나미다 시호라는 여자와는 엮이지 말자고 결심했기 때문이었다.


다카야마 히사노부의 맨션을 나온 뒤, 다이스케가 얼굴을 찌푸렸다.
"드디어 4분의 1이 끝났네. 앞이 까마득하다. 정말 전부 다 돌려줄 생각이야?"
"어쩔 수 없잖아. 자수하기 전에 최대한 갚겠다고 유키나리와 약속했다고." 고이치가 대꾸했다.
"돈을 돌려줘도 죄는 사라지지 않아."
"그야 그렇지. 하지만 사기죄가 약간 질이 안 좋은 장난 정도로 경감될 가능성은 있어. 너도 교도소에 오래 있는 것보다는 빨랑 나오는 게 좋을 거고. 집행유예를 받을 수만 있다면 그것도 받고 싶잖아?"
"그거야 뭐, 당연히 그렇지. 하지만 그 유키나리, 이런 큰돈을 잘도 빌려줬네."
"빌린 게 아냐. 상품 판매 대금이야."
"상품? 무슨 상품?"
"이제 곧 알게 돼. 하긴 머지않아 돈은 갚을 생각이야. 시즈나도 언젠가는 진짜를 갖고 싶을 테니." 그렇게 말하고 고이치는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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