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전화

유성의 인연/히가시노 게이고 (50)

개미남 | 2019.06.17 11:45:52 댓글: 2 조회: 220 추천: 1
분류추리소설 https://file.moyiza.com/fiction/3938549
유성의 인연/히가시노 게이고


2 - 25.

걸으면서 가시와바라는 휴대전화를 꺼냈다. 어딘가에 걸더니 작은 소리로 뭔가 말을 하고 있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 고이치 쪽을 돌아보았다.
"그래서, 무슨 이야기지? 다이스케 군에게 무슨 일이 있었냐?"
고이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가시와바라는 멈춰 서서 그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동생과는 관계없는 이야기인 모양이군."
"관계는 있어요. 그 사건에 대한 이야기니까요. 하지만 상의하려는 게 아니에요. 좀 물어볼 게 있습니다." 고이치는 턱을 당기고 눈을 슬쩍 위로 치뜨며 가시와바라를 보았다. "가시와바라 씨. 요즘도 골프 하세요?"
"골프? 아니, 관뒀어. 허리도 영 시원찮고 뭣보다 돈이 많이 들어서."
"그래요? 하지만 그 무렵에는 골프를 굉장히 좋아하셨지요? 사건이 일어났던 그 무렵에는?"
"음. 하기는 했는데 굉장히 좋아한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어"
"그런가요? 상당히 열심이시라고 생각했는데요? 잠깐이라도 틈이 나면 맨손으로 골프 연습을 했잖아요? 내가 봤어요. 그 사건이 일어난 날 밤에 우리 집 창문에서 수사를 위해 가장 먼저 달려온 가시와바라 씨가 검은 우산을 골프클럽 삼아 연습하는 것을 분명히 봤습니다."
가시와바라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내가 그랬었나?"
"우산을 거꾸로 잡고 있어서 손잡이가 이따금 땅바닥에 툭툭 스쳤죠. 그러면 손잡이에 가느다란 흠집이 잔뜩 생기겠지요?" 고이치는 잠시 틈을 두었다가 말했다. "아까 그 비닐우산처럼요."
가시와바라가 고이치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 얼굴에 웃음기는 사라지고 없었지만, 눈에서는 진지하고 위압적인 빛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거냐?"
"내가 생각을 좀 해봤어요. 도가미 씨 이야기가 정말이라면 현장에 남겨진 우산의 지문을 도가미 씨보다 나중에 온 사람이 지웠다는 얘기가 되겠지요. 하지만 도가미 씨가 집을 나간 직후에 우리가 돌아왔으니까 아무도 그 우산에 접근할 수 없었어요. 단지 한 부류의 사람들만을 빼고는."
가시와바라는 여전히 입 끝을 풀어놓은 채 시선을 돌리며 심호흡을 했다.
"경찰이라면 가능했다는 얘기?"
"그 범인은 엄청난 실수를 범했어요. 현장에 우산을 잊고 왔다는, 실로 단순한 실수죠. 게다가 거기에는 범인의 지문이 찍혀 있었어요. 그러니 범인도 나름대로 머리를 썼겠지요. 사건 소식이 처음 날아오자마자 누구보다 먼저 현장에 달려 나가 잽싸게 지문을 지워버리자ㅡ. 바깥은 아직 비가 내리고 있었으니까 범인은 다른 검은 우산을 받쳐 들고 현장에 나갔습니다. 피해자의 아이들의 눈을 피해 요령껏 비닐우산의 지문을 닦아낸 뒤에 집밖에 나가 다른 수사원들이 오기를 기다렸죠. 하지만 거기서 범인은 또 한 가지 큰 실수를 범했습니다. 검은 우산으로 골프 연습을 하는 장면을 피해자의 아들에게 그대로 보여주고 만 겁니다. 14년 뒤에 그것 때문에 범행이 발각되리라는 건 미처 생각도 못했겠지요. 아마 골프 연습이 버릇이 되었던 모양이지요?" 고이치는 가시와바라를 쏘아보았다. 자신의 입안이 바싹 말라 있다는 것을 느꼈다.
가시와바라가 천천히 고이치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이미 그곳에 웃음기라고는 없었다. 하지만 분노나 증오의 빛도 없었다.
"왜 아까 그 이야기를 하기무라에게 하지 않았지?"
"우선 내가 확인해보고 싶었어요. 내 귀로 진실을 듣고 싶었다고요. 둘이서만."
"그래." 가시와바라는 말하고 나서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쫓으며 고이치는 복잡한 심경에 휩싸여 있었다.
가시와바라는 이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신뢰했던 인물이었다. 다른 어느 누구보다 자신들을 혈육처럼 염려해주는 사람이라고 믿었다. 그런 사람을 의심해야 하는 현실. 게다가 아마도 범인이 틀림없을 거라는 현실이 저주스러웠다. 마침내 진상을 밝혀냈다는 성취감 따위는 털끝만큼도 없었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제발 뭔가 잘못 생각한 것이기를 간절히 빌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앞쪽에 육교가 나타났다. 가시와바라는 아무 말 없이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고이치도 그 뒤를 따라갔다.
육교 중간쯤에서 가시와바라는 걸음을 멈추었다. 두 팔을 쳐들고 크게 기지개를 켰다.
"도쿄는 공기가 영 안 좋아. 역시 요코스카가 최고야."
"가시와바라 씨." 고이치가 말했다. "당신이 범인이죠? 우리 아버지 어머니를 죽였지요?"
가시와바라는 육교 손잡이에 몸을 기대고 양복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담뱃갑을 꺼내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일회용 라이터로 불을 붙이려고 했지만 바람 때문에 잘 붙지 않았다. 몇 번 거듭한 끝에 겨우 불을 붙이자 고이치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연기를 토해냈다.
"대답하기 전에 내 쪽에서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뭡니까?"
"금시계 말이야. 그리고 사탕 통. DVD 가게에 침입했던 좀도둑이 바닷가에 버리고 간 자동차. 라고 해도 좋겠지." 가시와바라는 담배를 끼워넣은 손가락 끝으로 고이치를 가리켰다. "그거 모두 자네가 한 짓이지?"
고이치는 침묵하고 있었다. 하지만 부정하지 않는 것으로 인정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역시 그렇군." 가시와바라는 말했다.
"현경 본부에서 도가미 마사유키의 지문을 채취한 뒤에 내가 그의 가게까지 차를 태워줬어. 그때 물어봤지. 14년 전이 아니라 바로 최근에 그 금시계 비슷한 것을 만진 적이 없느냐고. 그랬더니 히로오 주차장에서 시계 하나를 주우려다 말았던 일이 있었는데 그 시계하고 비슷한 것 같다고 하더라고. 근데 그 시계 뒷면에는 스티커 같은 것이 붙어 있었다는 거야. 거기서 내가 확신했어. 누군가가 도가미 마사유키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하는구나 하고. 그런 일을 할 사람이라면 마음에 짚이는 건 한 사람밖에 없었어. 전에 자네가 몽타주와 비슷한 사람들의 리스트를 좀 구할 수 있겠느냐고 내게 말했던 게 생각나더라고." 가시와바라는 천천히 담배를 빨아들였다. "아마 다이스케 군이 어딘가에서 도가미 마사유키를 봤고, 그래서 사건 날 밤에 목격했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냈겠지? 그 말을 들은 자네는 경찰이 도가미를 조사했는지 확인해보기 위해 내게 찾아왔었어. 그런데 자네 생각대로 리스트를 입수할 수 없게 되자 강제적인 수단을 쓰기로 했어. 가짜 증거를 조작해서 경찰이 도가미를 의심하도록 작전을 편 거야."
고이치는 가시와바라와 마주하듯이 육교 반대쪽 손잡이를 등에 대고 섰다.
"진범으로서는 어지간히 당황스러웠겠군요. 다른 사람을 범인으로 모는 상황 증거들이 줄줄이 터져나왔으니까요."
"아주 훌륭했어. 도난차도 그렇고 뒤집힌 보트도 그렇고, 도구 사용에 빈틈이 없었어. 그런 각본을 째낸 건 자네였겠지?"
"뭐, 그럴지도."
"한 번 더 말해두겠는데 진짜 훌륭했어. 하지만 잘 모르겠단 말이야. 왜 그런 번잡한 짓을 했지? 다이스케 군이 사건 날 밤에 목격한 사람을 발견했다고 경찰에 연락했으면 다 끝날 일이었는데."
"우리에게도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어요.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경찰이 제대로 움직여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고요."
가시와바라는 어깨를 흔들며 웃었다.
"아닌 게 아니라 자네 뜻대로 어지간히 뛰고 돌아다녔네. 아니, 마구 휘둘렸다고 하는 게 좋을까?"
"그런가요?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가시와바라 씨만은 전혀 휘둘리지 않았을 텐데요? 도가미 씨가 범인이 아니라는 걸 다 알고 있었으니까요." 고이치는 격앙되는 마음을 억누르며 말했다. "이제 슬슬 내 질문에 대답해주셨으면 좋겠군요.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인 것은‥‥‥."
고이치가 하던 말을 멈춘 것은 누군가 육교를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이윽고 나타난 것은 두 어린아이들을 거느린 여자였다. 아이들은 둘 다 사내아이었다. 한쪽은 열 살 전후, 또 한쪽은 좀 더 아래로 보였다. 아마 형제일 것이다. 장난을 치느라 똑바로 걷지 않는 동생을 형 쪽이 나무라고 있었다.
어머니인 듯한 여자와 그 아이들은 고이치와 가시와바라 사이를 지나 반대쪽 계단을 내려갔다. 그 모습을 가시와바라는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 무렵의 자네들 같군."
"나는 좀 더 나이가 많았어요."
"그랬었나?" 가시와바라는 담뱃불을 발로 밟아 끈 뒤, 꽁초를 주워 바지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어머니와 어린 형제가 지나간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런 건 아무려나 상관없어요. 빨리 대답해봐요. 당신이 범인이죠?"
가시와바라가 고이치 쪽을 바라보았다. 그 표정은 온화했다. 초조감이나 낭패의 기척조차 없었다. 마치 모든 것을 달관한 듯한 눈빛이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생각했어. 14년 전의 그날 밤부터, 처음 자네들을 만났을 때부터 말이야. 언젠가 이 아이들에게 나는 크게 추궁당할 것이다. 그런 예감이 들었지."
그것은 고백에 다름 아니었다. 온몸이 뭉클 뜨거워지는 것을 고이치는 느꼈다. 하지만 몸의 중심은 얼어붙을 만큼 차가워져 있었다.
"왜요, 가시와바라 씨? 왜 죽였냐고요!" 고이치가 물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자신이 상대에게 '씨'라는 존칭을 붙이고 있는 게 화가 난다기보다 서글펐다.
가시와바라는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딱히 특별한 이유 같은 건 없어. 내가 나쁜 인간이라서 그랬어. 나쁜 인간이고 약한 인간이었기 때문에 그런 짓을 했어."
"그런 대답을 내가 받아들일 수 있겠어요?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여서 대체 무슨 좋은 꼴을 보려고 했느냐고요! 솔직히 말해요!" 양쪽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참으려고 했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가시와바라는 육교 손잡이에 몸을 기댔다. 여전히 감정의 기복이 느껴지지 않는 눈빛으로 골똘히 고이치를 응시해왔다.
"돈이야."
"돈?"
"그래, 돈 때문이었어. 그날 밤, 자네 아버지는 2백만 엔이라는 돈을 갖고 있었어."
"어째서 아버지가 그런 큰돈을?"
"사설 도박단 빚을 갚을 돈이었어. 여기저기서 긁어모은 모양이야. 하지만 실제 빚은 5백만 엔이 넘었어. 난처해진 자네 아버지는 내게 상의해왔어. 내가 야쿠자 중에 아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했었거든. 그래서 나하고 상의하면 어떻게든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야. 그래서 내가 그랬지. 알았다. 내가 나서서 협상해볼 테니까 그 2백만 엔을 나한테 맡겨라. 그 돈을 받으러 갔던 게 그날 밤이었어."
"하지만 당신은 도박단과 협상할 마음 같은 건 없었다. 애초부터 돈을 빼앗을 마음이었다. 그런 얘기군요?" 자신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고이치는 느꼈다. "우리 아버지 어머니를 죽이면서까지?"
그러자 가시와바라는 여기서 처음으로 표정에 변화를 보였다. 미간을 찌푸린 채 고뇌하는 기색이 입가에 감돌았다.
"그런 짓을 할 마음은 없었어. 나는 자네 아버지에게 이런 제안을 했어. 그 돈을 나한테 좀 빌려주면 그 대신 도박단이 적발되도록 힘을 써보겠다고. 하지만 자네 아버지는 응하지 않았어. 그런 짓을 했다가는 도박단에게 나중에 보복을 당한다고 했지. 끝장에는 나한테 속았다면서 화냈어. 그러다가 말다툼이 벌어지고‥‥‥." 가시와바라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변명 같은 건 관두자. 나는 자네 아버지를 칼로 찔렀어. 돈이 꼭 필요해서 그랬어. 그 현장을 목격했기 때문에 자네 어머니도 찔렀고‥‥‥. 그렇게 된 거야."
그가 내뱉은 한마디 한마디가 칼날처럼 고이치의 가슴을 찔렀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몸뚱이를 안쪽에서부터 도려내는 것만 같았다.
그 자리에 그만 주저앉고 싶은 것을 애써 견디고 있으려니 다음에는 격렬한 분노가 솟구쳤다. 갈기갈기 찢긴 마음의 상처 자리에서 검붉은 피 대신 증오가 흘러나왔다.
"용서 못해. 그런 이야기‥‥‥. 도저히 못 들어주겠어. 돈 때문에, 겨우 돈 때문에 부모가 살해되다니. 그런 지독한 이야기가 어딨냐고!" 고이치는 두 주먹을 부르쥐고 있었다.
하지만 한 걸음 앞으로 내밀려고 했을 때, 가시와바라가 제지하듯이 손을 내밀었다.
"그 이상 이쪽으로 다가오지 마. 자칫하면 오해를 사."
"뭔 소리야!"
"나는 말이지. 좀 더 빨리 이렇게 되었어야 한다고 생각해. 그날 밤이어도 좋았고. 내 아들놈이 죽은 날이어도 좋았어. 어쩌다가 오늘까지 구차한 목숨을 부지해버렸는지." 말을 마치자마자 가시와바라는 빙글 등을 내보이며 육교 손잡이에 올라탔다.
고이치는 헉 숨을 삼켰다. 미처 말이 나오지 않고 몸도 움직여지지 않았다.
가시와바라는 고이치를 돌아보았다.
"나 같은 인간은 되지 마라." 그리고 손잡이 너머로 사라졌다.
땅바닥에 뭔가가 부딪치는 소리, 급브레이크 소리, 둔한 충격음, 그런 것들이 고이치의 귀에 와 닿았다. 비명이며 고함소리도 들려왔다
하지만 고이치는 우두커니 선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 육교 위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추천 (1) 비추 (0) 선물 (0명)
IP: ♡.50.♡.203
마지막이야 (♡.104.♡.209) - 2019/06/17 12:28:24

헐...이런 반전이...
너무 재밋게 잘 봣네요...
그동안 올려주시느라 수고많으셨어요...^^

연가99 (♡.234.♡.236) - 2019/06/17 16:26:18

진짜 생각지도 못했던 반전이네요...
이로서 끝이 난거겟죠?
그럼 여동생이랑 도가미 정 아들은
좋은 결과가 잇엇겟네요...
긴장되면서도 슬픈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그동안 수고하셨어요.
내일부터는 더 재미있는 소설을 올려주세요.ㅎㅎ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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