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전화

유성의 인연/히가시노 게이고 (17)

개미남 | 2019.06.11 18:45:50 댓글: 0 조회: 113 추천: 0
분류추리소설 https://file.moyiza.com/fiction/3935117
유성의 인연/히가시노 게이고

1 - 17.

휴대전화로 게임을 하던 손을 멈추고 다이스케는 시간을 확인해보았다. 이제 곧 오후 8시가 되려는 시각이었다. 사은회가 시작되고 약 2시간이 지났다. 이제 슬슬 디저트가 나올 시간일 거라고 생각하며 게임을 종료시키고 전화기를 조수석에 내던졌다. 운전석 시트에 몸을 맡기고 대각선으로 앞쪽의 빌딩에 눈을 던졌다. <도가미 정> 히로오 점이 들어 있는 빌딩이었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시즈나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혹시라도 도가미 유키나리와 둘이 어딘가로 갈 것 같으면 미행을 할 예정이었지만, 아마 오늘 저녁도 허탕을 칠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다이스케는 지금까지의 경험상, 여자에게 무심한 남자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생각했다. 첫 번째는, 스스로는 여자에게 인기를 끌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하지만 상대 쪽에서 전혀 반응이 없는 타입. 그리고 두 번째는 결코 인기가 없는 건 아닌데도 다른 일에 관심이 쏠려서 여자와는 인연이 없었다는 타입이다.
대부분의 경우, 첫 번째 타입은 여자에 대해 적극적이다. 자신이 먼저 말을 할 용기는 없지만, 여자 쪽에서 자신을 좋아해줄 거라고 기대하는 뻔뻔함은 있다. 이런 타입을 공략하는 건 시즈나에게는 식은 죽 먹기였다. 눈을 감고서라도 넘어뜨릴 수 있었다. 돈을 우려내는 것도 간단해서 그리 큰 수고가 들지 않는다.
하지만 도가미 유키나리는 명백하게 두 번째 타입이었다. 오늘 저녁, 그가 시즈나를 초대한 것은 자신의 일을 위해서였다. 시즈나를 밉지 않게 봤다는 건 분명하지만, 그런 감정을 직장에서 내보여서는 안 된다는 고지식함을 갖고 있엇다. 아니, 그보다 시식회 뒤에 그녀에게 데이트를 신청하는 등의 일은 아예 생각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여자 쪽에서 데이트를 신청해주기를 원하는지도 모른다는 등의 억측을 하는 일도 당연히 없다. 그런 발상은 애초에 그의 머릿속에는 없는 것이다.
여간 아닌 시즈나도 이번에는 고생 좀 하겠어ㅡ. 집을 나서기 전에 다이스케는 고이치에게 말했었다. 아마 그럴 거라고 고이치도 고개를 끄덕였다.
고이치는 전날 요코하마에 다녀온 모양이었다. <도가미 정> 본점이 처음에 있었던 장소를 돌아보는 등, 도가미 마사유키에 관한 정보를 수집해왔다고 했다.
역시 사람을 잘못 본 게 아니냐고 고이치는 말했다. 사건이 일어난 시기에 도가미 마사유키는 자신의 식당을 꾸려가기도 바쁜 상황이었기 때문에 요코스카의 양식당까지 강도짓을 하러 갈 이유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도가미 정>과 <아리아케>의 연관성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잡히는 게 없다고 했다.
다이스케는 형의 조사 및 분석 능력에는 전폭적인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런 형이 하는 말이니까 그건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ㅡ.
그날 밤 이곳에서 도가미 마사유키의 얼굴을 본 순간의 충격은 지금도 다이스케의 가슴속에 남아 있었다. 물론 14년이나 지난 일이라서 자신의 기억이 변했을 가능성도 있고, 사람을 잘못 볼 수도 있다. 그런 건 다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다이스케에게는 도기미 마사유키의 얼굴이 사건이 났던 날 밤에 목격한 그자의 얼굴과 고스란히 겹쳐졌다. 한 치의 틀림도 없이. 복사본을 뜬 것처럼.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다.
다이스케는 머리를 저었다. 그 일에 대해 생각하는 건 그만두기로 했다. 괜한 딴 생각을 하다가 시즈나를 경호하는 데 소홀해져서는 영 재미없다.
다시 빌딩 쪽으로 시선을 던졌을 때, 도가미 유키나리가 나타났다. 다이스케는 흠칫 놀라 몸을 일으켰다. 유키나리 옆에 시즈나도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유키나리는 그녀의 등을 손으로 감싸고 있었다.
두 사람은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려 도로를 건너기 시작했다. 다이스케도 따라서 고개를 들었다. 그저 배웅만 하는 것이라면 유키나리까지 함께 건너올 리가 없었다.
시즈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어딘지 힘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술에 취한 것 같지는 않았다.
두 사람이 길을 다 건넌 순간, 유키나리가 손을 번쩍 쳐들었다. 검정 택시가 두 사람 앞에 서고 뒷좌석의 문이 열렸다.
설마, 하고 생각하면서 다이스케는 차의 시동을 걸었다. 하지만 그의 감은 정확했다. 유키나리가 시즈나를 차에 태운 뒤, 그 역시 뒷좌석에 올라탄 것이다.
택시가 떠나는 것과 거의 동시에 다이스케도 차를 움직였다. 왼손으로 조수석의 휴대전화를 쥐고 주위에 경찰차가 없는지 확인하며 버튼을 눌러댔다.
"무슨 일이야?" 고이치가 댓바람에 물어왔다. 이 시간에 연락이 온 것만으로도 뭔가를 예감한 모양이었다.
"시즈나가 유키나리와 함께 <도가미 정>에서 나왔어. 그뿐만이 아니야. 둘이 함께 택시를 탔어."
"식당에서 나온 사람이 둘뿐이야?"
"그래. 둘이 나란히 나왔어. 유키나리 녀석, 시즈나의 등을 감싸고 있더라고."
"그거 이상하네."
"뭐가 이상해? 드디어 시즈나가 놈을 함락시켰다는 거 아니야?"
"그렇다고 해도 다른 손님들이 식당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건 뭔가 이상하지. 유키나리가 나온 걸 보면 시식회는 끝났다는 거 잖아? 녀석이 다른 손님들을 놔두고 먼저 돌아갈 리가 없어."
고이치의 말대로였다. 역시 냉철하구나. 하고 다이스케는 감탄했다.
"어느 쪽으로 가고 있지?" 고이치가 물어왔다.
"록폰기 거리로 들어왔어. 다메이케 방향으로 가는 중."
"그대로 계속 미행해. 절대로 놓치지 마."
"알았어. 혹시 호텔이나 러브호텔에 들어갈 눈치가 보이면 지난번 그 방법으로 나갈게."
그럴 경우에는 시즈나에게 휴대전화를 걸기로 약속이 되어있었다. 부모가 갑작스러운 사고를 당했다는 연락을 보내는 것이다. 그런 소식을 들은 시즈나를 계속 붙잡아두려는 몰상식한 남자는 없을 터였다.
"응, 그 방법을 쓰면 되겠지만 아마 그런 곳에는 안 갈 거다." 고이치가 말했다. "아무튼 조심해서 미행해."
알았음. 이라고 대답하고 다이스케는 전화를 끊었다.
시즈나와 유키나리가 탄 택시는 오치보리 거리에서 가지바시로, 다시 신오바시 거리로 달려갔다. 그 방향으로 봐서 목적지는 대충 짐작이 되었다. 택시는 분명 니혼바시로 향하고 있었다. 니혼바시 하마초에는 시즈나의 맨션이 있었다.
택시는 스이텐구마에 네거리를 지나면서 좌회전했다. 이제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유키나리는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줄 생각인 것이다.
짙은 회색 건물 앞에서 택시는 멈춰 섰다. 유키나리가 내리고, 뒤를 이어 시즈나가 차에서 나왔다. 다이스케는 두 사람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유키나리가 집에까지 올라갈 눈치를 보이면 그에 따른 대응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유키나리는 시즈나에게 몇 마디 말을 건넨 뒤, 다시 택시에 올라탔다. 택시가 달려가는 것을 지켜보더니 시즈나는 맨션으로 들어갔다.
다이스케는 차를 길가에 세우고 엔진을 껐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맨션을 향해 뛰어갔다.
혹시 있을 불상사를 생각해서 시즈나의 맨션 열쇠는 다이스케도 갖고 있었다. 오토록을 해제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집은 5층이었다. 엘리베이터가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다이스케는 몇 번이나 발을 동동 굴렀다.
503호실 앞에서 차임벨을 울린 뒤 손잡이를 돌렸다. 물론 잠겨 있지 않았다.
시즈나는 원룸의 플로어 한가운데 주저앉아 있었다. 코트를 입은 그대로였다. 다이스케를 돌아보는 그녀의 얼굴은 창백해져 있었다.
"작은오빠‥‥‥."
"무슨 일이야?" 다이스케는 구두를 벗어던지고 안으로 들어갔다. "도가미가 왜 여기까지 너를 바래다줬지? 어디 몸이라도 아팠어?"
시즈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 아냐. 미안. 나, 이번 작전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렸어."
"엉망으로? 무슨 소리야. 찬찬히 설명해 봐." 다이스케는 시즈나 옆에서 책상다리를 틀었다. 새삼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흠칫 놀랐다. "시즈나, 너 울었어?"
그녀의 눈가의 화장이 뭉개져 있었던 것이다.
"참으려고 했는데 저절로 눈물이 쏟아져서. 정말 미안."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묻잖아. 대답해 봐." 다이스케는 자신의 양 무릎을 내리쳤다.
시즈나는 미간에 주름을 잡고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다이스케는 더욱더 답답했다.
"시즈나, 제발 좀ㅡ."
"하야시라이스‥‥‥."
"뭐?"
시즈나가 다이스케를 바라보았다. 호흡을 가다듬으려는 듯 가슴을 들먹거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시식회 마지막에 하야시라이스가 나왔어. 그 도가미 유키나리가 말했던, 새 체인점의 자랑거리라는 하야시라이스."
"그게 어쨌는데?"
"똑같았어."
"뭐가?"
시즈나는 대답을 망설이듯이 입술을 핥고 나서 말했다. "우리 꺼하고‥‥‥."
"우리 꺼?"
"아버지가 만들어주던 하야시라이스. <아리아케>의 하야시라이스. 오늘 저녁에 먹은 하야시라이스가 그거하고 똑같았어. 완전히 똑같은 맛이었어."

시즈나의 말을 들은 뒤에도 고이치는 팔짱을 낀 채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공간의 어딘가 한 점을 골똘히 바라보고 있었다.
다이스케는 침대에 걸터앉아 형의 반응을 기다렸다. 고이치를 시즈나의 맨션에 호출한 것은 십여 분 전이었다. 무슨 일인가 하고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한 고이치에게 일단 시즈나의 말을 들어보라고 했던 것이다.
"나는 믿을 수가 없어." 고이치가 한 점을 응시한 채 말했다. "그런 일, 있을 리가 없어."
"하지만 사실이야. 믿어줘. 큰오빠. 나, 정말 걷잡을 수 없어 눈물이 쏟아졌어. 그 맛, 그 하야시라이스의 맛이 너무 그리워서‥‥‥." 시즈나는 슬픈 얼굴로 호소했다.
고이치가 시즈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네가 그 맛을 기억하고 있어? 아버지가 만들어준 하야시라이스. 벌써 14년 전의 옛날 일이야."
"나, 기억해. 그걸 어떻게 잊어? 정말로 좋아했는데?"
"게다가 요즘도 먹고 있지." 다이스케도 말했다. "형이 가끔 그 요리를 해주잖아?"
그러자 고이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냐. 내가 만드는 건 아버지의 하야시라이스가 아냐."
"알아. 오빠가 만들어주는 건 아버지의 하야시라이스가 아니야." 시즈나가 말했다.
"그래. 형?" 다이스케는 고이치를 바라보았다.
"전혀 다르지. 내가 요즘 만드는 건 생략 버전이야. 아버지의 하야시라이스는 훨씬 더 손이 많이 가."
"나는 몰랐는데‥‥‥." 다이스케가 머리를 긁적였다.
"너는 맛에는 둔한 편이니까." 고이치는 뺨을 풀며 웃은 뒤 시즈나를 보았다. "하지만 미묘한 차이라는 건 분명해. 그걸 시즈나, 너는 알고 있었다는 거야?"
"당연하지. 그래서 정말 깜짝 놀랐어. 오늘, 거기서 그걸 맛보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으니까."
시즈나의 말을 듣고 고이치는 다시금 팔짱을 꼈다. 의자에 깊숙이 몸을 맡기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정말로 아버지의 맛이었단 말이지?"
"틀림없어." 시즈나는 대답했다.
좋아. 라고 말하며 드디어 고이치는 의자에서 일어섰다.
"다이스케, 자동차 키 좀 줘."
"어디 가려고?"
"슈퍼에. 츠키시마에 스물네 시간 영업하는 슈퍼 있었지?"
"슈퍼에? 뭐하려고?"
"그야 뻔하지. 하야시라이스 재료를 사러 갈 거야."
다이스케는 시즈나와 동시에 놀람의 소리를 올렸다.
"형. 지금 그 요리 하려고?"
"그래. 생략 버전이 아냐. 진짜 아버지의 맛을 재현할 거야. 그래서 시즈나가 먹어보고, 오늘 저녁 <도가미 정>에서 먹은 하야시라이스와 맛을 비교해보는 거야. 확인할 방법은 그거밖에 없잖아?" 그렇게 말하자마자 고이치는 재킷을 집어 들고 방을 나섰다.
그리고 약 2시간 뒤, 집 안에는 소스 향기가 가득 찼다. 고이치는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부엌에서 부지런히 움직였다. 원래 요리에는 선수였지만, 그토록 생생한 표정으로 임하는 모습을 다이스케는 본 적이 없었다.
"시식회에서 먹고 왔는데도 냄새를 맡으니까 또 배가 고프네." 시즈나가 그렇게 말하며 혀를 쏙 내밀었다.
"아, 그보다 도가미란 녀석은 어땠어? 네가 우는 바람에 깜짝 놀란 거 아냐?" 다이스케는 물었다.
시즈나는 기운 빠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말하면 뭐해? 다른 손님들도 흘끔흘끔 쳐다보고, 정말 난감했지. 도가미가 어디 몸이 불편하냐고 물어보는데 내가 아무 대답도 못하니까. 아무튼 밖으로 나가자면서 나를 데리고 나왔어. 그리고 내 코트를 가져오더니 집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하더라고. 나, 완전히 정신이 나가서 도가미가 하라는 대로 그냥 택시를 탔어."
"도가미가, 우는 이유를 물어보지 않았어?"
"아니, 택시 안에서 집이 어디냐고 물어본 것 말고는." 그렇게 말하더니 시즈나는 불쑥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 사람, 꽤 좋은 사람인지도."
다이스케는 고이치를 돌아보았다. "형은 어떻게 생각해?"
"뭐가?"
"이번 작전 말이야. 오늘 일로 뭔가 차질이 생긴 건 없어? 시즈나는 계획이 엉망이 되었다고 걱정했는데."
"그 작전을 어떻게 할 것인지는‥‥‥." 고이치는 냄비 안을 들여다보며 말을 이었다. "이 하야시라이스의 맛에 달렸어."
형의 말에 다이스케는 시즈나와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리고 다시 2시간 뒤, 테이블에는 하야시라이스를 담은 접시가 놓여졌다. 그 앞에 앉아 시즈나가 스푼을 들었다.
고이치와 다이스케가 지켜보는 가운데, 그녀는 스푼으로 하야시라이스를 떠서 입안에 넣었다. 그 눈에는 긴장한 빛이 가득했다.
입을 움직이던 시즈나의 눈이 떠졌다. 다시 또 한 스푼을 떠먹었다.
어때? 하고 고이치가 물었다.
시즈나는 그를 돌아보며 깊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네? 이거, 아버지 맛이야."
다이스케도 스푼을 들고 하야시라이스를 먹어보았다. 그것은 말 그대로 <아리아케>의 맛이었다. 그리움이 입안에 스르르 퍼졌다. 감각이 10여 년 전으로 되돌아간 듯했다.
"오늘 저녁에 <도가미 정>에서 먹은 하야시라이스도 이 맛이였어?" 고이치가 물었다.
시즈나는 곧바로 대답하는 대신 다시 한 스푼을 먹어보았다. 그리고 슬쩍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떤데? 하고 고이치가 재촉했다.
"음, 거의 똑같아. 하지만, 아주 조금이기는 해도 다른 것 같기도 하고‥‥‥."
"뭐야. 역시 다른 거였어?" 다이스케가 웃으며 말했다.
"그게 아냐. <도가미 정>의 하야시라이스에는 먹은 다음에 은근히 남는 향기가 있었고. 그게 아버지의 하야시라이스하고 완전히 똑같았어. 그 향기가 큰오빠의 하야시라이스에는 없어. 그래서‥‥‥. <도가미 정> 쪽이 더 아버지의 하야시라이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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