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전화

유성의 인연/히가시노 게이고 (14)

개미남 | 2019.05.30 22:34:04 댓글: 0 조회: 180 추천: 1
분류추리소설 https://file.moyiza.com/fiction/3927976
유성의 인연/히가시노 게이고

1 - 14.

도가미 유키나리의 기척을 보고 시즈나는 아무래도 이쪽 페이스대로 잘 풀리는 것 같다고 감지하고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성실하고 일에 열정적인 남자였다. 게다가 여성의 교활함이나 계산이 빠르다는 것 등은 지금껏 별로 접한 적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럴싸한 의견을 늘어놓는 다카미네 사오리라는 여자의 마음속에 그의 마음을 갖고 놀겠다는 속셈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됐어. 이 정도면 잘되겠어. 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하지만 자기 자신에게 그런 다짐을 하는 것 자체가 드문 일이었다.
실은 그녀는 평소와 미묘하게 느낌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그 이유는 그녀 스스로도 잘 알 수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죄책감 비슷한 것이 어렴풋이 가슴에 번지는 것이었다. 지금까지도 그런 마음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런 느낌을 머릿속에서 몰아내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속아 넘어가는 사람이 바보. 라는 신념이 항상 더 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 밤은 조금 달랐다. 다른 때 같으면 오만하게 상대를 내려다보는 기분을 가질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거꾸로 누군가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듯한 마음이 들었다.
어쩌면 그건 이 양식당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식당에 들어선 순간부터 묘하게 마음이 들썩거리는 것이었다. 자신의 마음 한 귀퉁이에 있는 오래된 문을 누군가 노크한 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결코 나쁜 기분은 이니었다. 오히려 무심코 마음의 빗장을 열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것이 그녀를 당황하게 만들고 있었다.
아마 여기가 양식당이기 때문일 거야. 하고 시즈나는 생각했다. 옛날에 아버지와 엄마가 경영했던 <아리아케>와는 넓이도 고급스러움도 전혀 다르기는 했다. 하지만 이곳에 감돌고 있는 공기 속에는 명백히 공통된 것이 있었다. 그 공기가 그녀의 의식을 어린 시절의 나날들로 데려가려고 했다. 남에게 사기를 치는 일 따위. 생각도 못했던 천진한 나날로.
"무슨 불편한 일이라도?" 유키나리가 물어왔다. 불안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시즈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밖에 마음에 걸리는 점은 없었어요? 어떤 것이라도 괜찮아요. 만일 뭔가 있다면 서슴없이 말해줘요. 쓸데없는 지식이나 선입견이 없는 분의 의견일수록 우리에게는 큰 참고가 됩니다." 유키나리의 말투는 여전히 진지하고 뜨거웠다.
시즈나는 찻잔을 내려놓고 주위에 한 바퀴 시선을 내달린 뒤에 말했다.
"그럼, 또 한 가지만."
"뭐죠?" 유키나리가 윗몸을 내밀어왔다.
"저 안쪽 자리 말인데요. 아까부터 조금 마음에 걸렸어요."
"안쪽?"
식당 안쪽에 다른 곳과는 구분된 공간이 있고, 그곳에 테이블 네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곳에 앉아 있는 손님은 모두 커플인 것 같았다.
"저쪽 공간만 조명이 조금 다른데요?" 시즈나는 말했다.
유키나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소중한 사람과 조용한 분위기에서 식사하기를 원하는 손님. 아, 대개는 커플인 경우가 많습니다만. 그런 분들을 위해 준비해둔 공간이에요. 조명을 좀 낮춘 것은 분위기를 아늑하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할까. 그런 겁니다." 그렇게 말하고 유키나리는 시즈나를 바라보았다. "그게 뭔가 안 좋은가요?"
"그건 좋은데요. 조명의 각도가 좋지 않다고 생각해요."
"각도?" 허를 찔린 얼굴로 유키나리는 다시 안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전체적으로 어두운데 한쪽 방향에서만 빛이 강하게 들어오기 때문에 얼굴에 그림자가 생겼어요. 그렇게 되면 사람의 얼굴이란 건, 그리 예쁘게 보이지 않거든요."
"앗, 그런가?"
"이를테면 어둠 속에서 사람 얼굴에 대고 아래쪽에서 손전등을 비추면 굉장히 으스스하게 보이지요?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그런 거예요."
"그렇군요. 나는 생각해본 적도 없었네. 하지만 자기 얼굴이 어떤 식으로 보이는지. 본인은 모르는 거 아닐까요?"
"다른 손님의 얼굴을 보고서 내게는 어떤 식으로 빛이 와 닿는지 상상할 수 있겠지요. 여자란 항상 상대방에게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 신경을 쓰는 법이니까요."
유키나리는 감탄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 남자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군요. 이것도 큰 참고가 되겠어요. 고마워요." 유키나리는 수첩에 뭔가 적어넣고 다시 한 번 안쪽 자리를 쳐다보았다. "새 점포는 물론이고 다른 체인점의 조명도 다시 한 번 점검해보는 게 좋겠어."
"새 점포?"
"실은 이번에 아자부쥬반 쪽에 새로 체인점을 낼 예정이예요. 그 점포를 어떻게 꾸미느냐 하는 문제로 요즘 내내 고민 중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카미네 씨의 의견도 꼭 듣고 싶었어요. 그쪽 점포는 오픈 준비에서 경영까지 모두 내가 맡기로 했거든요."
큰오빠가 아주 정확히 조사했군. 이라고 생각하며 시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대단하시네요."
"기왕 내가 맡았으니까 다른 점포에는 없는 특징을 만들어갈 생각입니다. 그렇긴 한데, 이게 말로 하는 만큼 간단히 되는 일이 아닌 것 같아요."
"어떤 식당으로 만드실 생각이세요?"
시즈나가 묻자, 그 질문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유키나리는 눈을 반짝였다.
"한마디로, 손님들이 흥겹게 대화할 수 있는 식당입니다. 내가 보기에는 지금까지의 <도가미 정>은 어디나 지나치게 점잖은 분위기예요. 그래서 대화를 즐기는 넉넉한 분위기가 모자란 것처럼 느껴져요. 시끄러운 건 물론 안 되겠지만, 식사에는 대화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대화가 신이 나느냐 마느냐는 손님에 따른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나는 식당 안의 레이아웃이나 종업원의 접대 태도에 따라서도 크게 달라질 거라고 생각해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는 유키나리를 보며, 이 사람은 인간의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악의를 한 번도 접해본 일이 없는게 아닐까. 하고 시즈나는 생각했다. 그것을 실감하게 해서 잔뜩 실망시켜주고 싶다는 심술궂은 마음이 솟구쳤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그의 순수함이 부럽기도 했다.
실은요. 라고 유키나리는 말했다. 그 얼굴은 새로운 장난거리를 생각해낸 초등학생 같았다.
"대표 메뉴로 정해둔 게 있어요."
"뭔데요?"
"그건‥‥‥." 그는 목소리를 낮췄다. "하야시라이스."
네? 라고 시즈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야시라이스가 대표 메뉴예요?"
유키나리는 고개를 크게 위아래로 흔들었다.
"물론 그것만 있는 건 아닙니다. 코스 요리로 생선이나 고기를 먹은 뒤에 햐야시라이스로 마무리를 하는 거죠. 당연히 중간 요리는 하야시라이스를 전제로 하게 됩니다. 마지막에 나오는 하야시라이스를 어떻게 더 맛있게 즐길 수 있게 하느냐, 거기에 중점을 두는 거예요."
"맛있겠네요. 하지만 지나치게 배가 부를 것 같은데요?"
"여자 분들도 다 먹을 수 있도록 모든 요리의 양을 조정할 필요는 있겠지요."
"자신이 있으신가 봐요. 하야시라이스에?"
시즈나의 말에 유키나리는 꾸욱 턱을 당겼다. 슬쩍 가슴을 내민 것처럼도 보였다.
"우리 식당이 지금처럼 크게 된 것도 원래 하야시라이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게 인기를 끌어서 서서히 손님이 불어났거든요."
"그렇게 맛이 있다면 오늘 밤에 하야시라이스를 먹을 걸 그랬네요."
그러자 그는 미소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유감스럽게도 지금 이 식당에서 나오는 하야시라이스는 원래의 것이 아니예요. 아버지는 새 체인점을 낼 때마다 책임자에게 각기 오리지널리티가 있는 하야시라이스를 만들라고 지시합니다. 본가의 원조 하야시라이스 레시피는 부하직원에게도 절대 가르쳐주지 않아요. 즉 똑같은 <도가미 정>의 하야시라이스라고 해도 각 체인점마다 맛이 다른 거죠."
"그럼, 이번에 오픈하는 곳에서도 또 새로운 하야시라이스를?"
"아뇨, 이번 체인점에서는 원래의 맛으로 갑니다." 유키나리는 선언하듯이 말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원조 <도가미 정>의 하야시라이스를 판매할 생각이예요. 아버지를 설득해서 최근에야 겨우 승낙을 받았습니다."
"아버님께 레시피를 배우셨어요?"
"네, 겨우 알아냈습니다. 그 맛을 재현하느라 고생 많이 했죠. 아참, 사실은 이번에 그 하야시라이스의 시식회를 개최해요. 다카미네 씨만 좋다면, 거기에 오시겠습니까? 꼭 맛을 봐주셨으면 좋겠는데."
"제가요? 괜찮으시겠어요?"
"부탁해요. 요리 전문가들보다 다카미네 씨처럼 순수한 고객의 의견이 훨씬 더 참고가 됩니다. 아니, 꼭 참고하고 싶군요."
열의를 담아 말해주는 유키나리를 보며 시즈나는 내심 고소하게 웃고 있엇다. 그렇잖아도 다음에 그와 만날 구실을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야시라이스 시식회라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고이치에게 말하면, 아마추어이면서도 프로의 가슴을 철렁하게 할 시식 의견을 분명 만들어줄 것이다. 조금 전에 유키나리에게 말했던, 단골손님의 존재감이 지나치게 강해서 처음 찾아온 손님은 뭔가 불편하다는 의견도 고이치에게서 받아온 것이었다.
"아차,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손목시계를 보며 유키나리가 말했다. "너무 오래 붙잡고 있어서 미안해요. 이 뒤로 뭔가 예정이 있었던 거 아닌가요?"
"아뇨, 오늘은 아무것도."
혹시 데이트를 신청하려나, 하고 시즈나는 기대했다.
"그래요? 그거 다행이네."
하지만 유키나리는 그런 눈치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시즈나는 가방을 집어 들었다.
"그러면 계산을‥‥‥."
"아뇨, 천만에요." 유키나리는 가로막듯이 오른팔을 내밀었다. "오늘 저녁은 내가 부탁한 일이니까 식사비는 괜찮아요. 내가 사드리는 것으로 해줘요."
"그래도‥‥‥."
"귀중한 의견을 받았으니 그걸로 충분해요. 부디 마음 쓰지 말아요."
더 이상 이러니저러니 할 수 없게 하는 단호한 어조에는 믿음직함이 느껴지는 구석이 있었다. 그저 만만하기만 한 도련님은 아닌지도 모르겠다. 라고 시즈나는 생각했다.
그럼 감사히. 라고 말하며 그녀는 머리를 숙였다.
자리에서 일어서자 유키나리도 뒤를 따라왔다. 배웅해줄 모양이었다.
카운터 자리에는 아직 손님들의 모습이 보였다. 서로 와인을 따라주며 한창 흥이 올라 있었다.
"다카미네 씨의 지적이 정확한 것 같군요." 식당을 나와 엘리베이터가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에 유키나리가 말했다. "단골손님들이 지나치게 두드러지는 건 딱히 좋은 일만은 아닌 것 같아요. 그렇다고 단골손님을 허술히 대할 수도 없고. 흠, 어려운 문제네."
"너무 고민하지 마세요."
"아뇨, 내 손으로 첫 걸음부터 식당을 만들어가는 거니까 대충 타협하고 싶지는 않아요."
유키나리가 결연히 말했을 때,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회색 정장을 입은 백발의 남자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 초로의 남자는 유키나리를 보고 발을 멈추었다.
"어, 네가 와 있었냐?"
"아버지야말로 웬일이세요? 오늘 밤, 요코하마에 가기로 하지 않았어요?"
유키나리의 말에 시즈나는 놀라서 상대 남자를 응시했다. 그러면 이 인물이 <도가미 정>의 사장 도가미 마사유키?
"예정이 바뀌었어. 너야말로 여기서 뭐하고 있어?" 그렇게 말하고 도가미 마사유키는 흘끔 시즈나 쪽을 돌아보았다.
"아, 이 아가씨의 의견을 들었어요. 전에 말했죠? 와인 파티에서 만났다고 했던 아가씨. 바로 이 아가씨예요."
"아, 그렇구먼." 도가미 마사유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부러 여기까지, 고마워요. ㅡ 그래서 어떤 귀한 의견을 얻었지?"
"다음에 천천히 말씀드리죠. 크게 참고가 되었어요."
"그래? 그거, 잘됐구나." 도가미 마사유키는 시즈나에게 웃음을 건네왔다. 포용력이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그럼 저는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아래층까지 데려다드리죠." 유키나리가 말했다.
"여기에서도 괜찮아요. 정말 잘 먹었습니다." 시즈나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빌딩을 나와 잠시 걸어간 참에 휴대전화가 울렸다.
"반대쪽 차선이야." 다이스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둘러보니 파란 라이트밴이 세워져 있고 그 안에 다이스케의 모습이 보였다.
시즈나는 도로를 건너 조수석에 올라탔다. <도가미 정>이 입점해 있는 빌딩이 오른편 대각선 앞쪽으로 보였다.
"어땠어?" 다이스케가 물어왔다.
"그럭저럭 괜찮은 편. 나쁜 인상을 주지는 않은 거 같아."
"그래도 식사 후에 데이트까지는 진도를 빼지 못했구나? 만일 그럴 경우에는 미행하면서 상황을 지켜보라고 형이 지시했는데‥‥‥. 변장 도구까지 들고 왔는데 필요 없게 됐네."
시즈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 사람, 상당히 고지식한 인물이야. 적절히 내 쪽에서 먼저 유도해주지 않으면 절대로 손을 안 내밀 것 같아."
다이스케가 큭큭 웃었다. "맞아. 심하게 고지식한 느낌이더라."
"하지만 다음에 만날 약속은 잡아뒀으니까 걱정 마."
"거, 아주 든든하네." 그렇게 말하며 다이스케는 시동을 걸려다가 갑자기 그 손을 멈추었다. "엇, 그자가 나오는데?"
빌딩에서 유키나리가 나오는 참이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도가미 마사유키도 나왔다. 뭔가 볼일을 다 마쳤는지도 모른다. 두 사람은 택시를 잡더니 어딘가로 사라졌다.
"저런 아버지와 아들도 있구나. 돈도 많이 벌고 대 성공을 거둔 아버지와 아들." 택시를 지켜보며 시즈나는 말하고 옆자리의 다이스케를 바라보았다.
왜 그런지 다이스케는 얼굴이 잔뜩 일그러진 채 택시가 달려간 쪽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잊은 것 같았다. 그토록 험악한 다이스케의 얼굴을 시즈나는 본 적이 없었다.
"왜 그래. 작은오빠?"
"저 사람‥‥‥, 뒤따라 나온 나이 든 사람. 도가미 유키나리의 아버지야?" 다이스케의 숨소리가 거칠게 흐트러져 있었다.
"맞아, 근데 그게 왜?"
저자야. 라고 다이스케는 중얼거렸다.
"뭐?"
"그날 밤‥‥‥, 아버지와 엄마가 살해된 그날 밤. 우리 집 뒷문에서 뛰어나갔던 남자‥‥‥. 지금 저 사람이 그때 그 남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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