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전화

유성의 인연/히가시노 게이고 (11)

개미남 | 2019.05.30 22:27:42 댓글: 0 조회: 180 추천: 1
분류추리소설 https://file.moyiza.com/fiction/3927970
유성의 인연/히가시노 게이고



1 - 11.

가와노 다케오는 마치 여행대리점 영업사원처럼 테이블 위에 팸플릿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거기에 한 장의 리포트 용지까지 올려놓았다. 리포트에는 직접 손으로 쓴 온갖 숫자가 보였다.
"여기저기 조사해본 결과, 역시 하코네가 좋을 거 같아. 거기에 교통편 등을 생각하면 여기 세 군데 여관이 좋겠어. 등급도 적당하고 요리도 꽤 괜찮은 게 나올 거야. 요금에는 별로 큰 차이는 없어. 나름대로 여러 곳을 비교해봤는데, 대충 이 정도야." 가와노는 리포트 용지를 시즈나 쪽으로 밀어주었다.
세 곳의 여관을 이용했을 경우, 각각 비용이 얼마나 드는가를 계산해놓은 모양이었다. 여행 경비는 모두 가와노가 내기로 했기 때문에 여자친구에게 굳이 이런 것을 보여줄 필요는 없을 터였다. 아마도 나는 너를 위해 이만큼 돈을 들인다. 라는 점을 과시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이그, 이런 짓을 하니까 여자가 안 따르는 거야. 하고 시즈나는 마음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물론 그런 속마음은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다. 다 좋을 거 같아. 라고 가와노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그럼 내가 결정할까?"
"응, 그건 좋은데. 미안해. 아직 휴가를 낼 수 있을지 어떨지 모르겠어."
그 즉시 가와노의 얼굴이 흐려졌다.
"그래도 토요일, 일요일인데 ‥‥‥."
시즈나는 머리를 저었다.
"외판원에게는 토요일이고 일요일이고 없어. 직장 다니는 고객들과 느긋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주말밖에 없잖아? 고객들이 평일에는 다들 근무를 하니까."
"‥‥‥아, 그래?" 가와노는 토라진 표정을 지었다.
약간 헤싱헤싱해진 머리, 늘어진 볼, 칠칠맞게 불룩 나온 배ㅡ. 어떻게 봐도 서른다섯 살로는 보이지 않는 한심한 풍모였다.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하고 일단 약품회사에 취직했지만 조직에 제대로 섞여들지 못해 겨우 반년 만에 그만두었다고 한다. 현재는 과학 교사로서 사회생활을 꾸려나가고 있지만, 학교에도 친한 사람이 없고 학생들에게서도 괴짜 취급을 받는 모양이다. 이상이 고이치가 전해준 정보였다.
하지만 정말로 괴짜인 건 아니고, 단순히 사람과의 교제가 서툰 것뿐이었다. 그래도 남들처럼 연인도 사귀고 싶고 그 참에 결혼도 하고 싶어서 중매회사의 이벤트 파티에 인터넷으로 신청했다. 하지만 자기 쪽에서 여자에게 말을 건넬 배짱 같은 건 없었다. 시즈나 쪽에서 먼저 접근했을 때도 처음에는 갈라진 목소리에 눈빛은 겁에 질린 개 같은 꼴이었다.
그런 남자를 손안에서 갖고 노는 일 따위. 시즈나에게는 식은 죽 먹기였다. 파티 이후로 그에게서 문자가 오지 않은 날은 없었다. 지금까지 식사를 세 번 했고, 그중 한 번은 영화도 함께 보러 갔다. 겨우 그것만으로 가와노는 뛸 듯이 좋아했다. 완전히 시즈나의 남자친구가 되었다는 듯한 태도였다.
슬슬 본격적인 작전에 들어가 돈을 우려내자고 생각했을 무렵. 가와노가 온천 여행을 가자고 제안해왔다. 여자와의 교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파악하고 있었던 만큼 이런 적극성은 뜻밖이었다. 하지만 그와 이야기해보니 그 속셈이 빤히 보였다. 그는 인터넷 게시판을 수시로 들락거렸다. 주위 사람에게 말하기 힘든 일도 마음놓고 상담할 수 있어서 퍽 편리하다고 했다. 아무래도 그 게시판에서, 그녀와 깊은 관계를 맺으려면 온천 여행을 제안해보라는 조언을 받은 모양이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참 오지랖도 넓은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두 사람은 이케부쿠로 역 앞에 있는 대형서점에 와 있었다. 서점 이층이 커피숍인 것이다. 시즈나는 홍차를 마시며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편의점 앞에 화려한 체크무늬 셔츠를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머리는 길고, 검은 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손에는 종이봉투를 들었다. 처음 그 모습을 보았을 때, 시즈나는 웃음이 터졌다. 만일 그 모습으로 아키하바라처럼 요란한 거리에 가 있다면 주위 풍경에 너무 녹아들어서 도저히 못 찾아낼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테이블 밑에서 가방 속에 든 휴대전화를 조작했다. 단축번호를 누르는 일은 잠깐 더듬어보는 정도면 충분했다.
편의점 앞에 있던 남자가 반응하는 게 보였다. 호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고 있었다. 그것을 확인하고 나서 전화를 끊었다. 이걸로 신호 완료였다.
"그럼, 유카리가 쉬는 날은 언제쯤에 알 수 있지?" 가와노가 물어왔다.
"글쎄‥‥‥."
고개를 갸우뚱하며 유카리라는 이름은 무슨 한자를 쓰는 거였지. 라고 시즈나는 생각했다. '有香里'였는지 '由加里'였는지. 아무래도 자신이 없었다. 처음 자기소개를 한 뒤로 이름을 한자로 써본 적이 없었다. 휴대전화 문자는 항상 한자 없이 '유카리'라고만 보냈다.
"내 책임량만 처리하면 이런저런 예정을 짜기가 쉽기는 할텐데‥‥‥."
"책임량이란 거, 그렇게 빡빡한가?"
"그야 그렇지." 시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계약을 따오지 못하면 회사도 우리를 고용한 의미가 없잖아. 조금이라도 실적이 안 좋으면 즉각 월급에 반영되는데 , 뭐."
흐음, 이라고 가와노는 얼른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회사나 기업이라는 말이 그에게는 큰 약점이었다. 자신이 도망쳐 나왔다는 의식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런 사람에게 진학 지도를 받아야 하는 학생들이 딱하다고 시즈나는 생각했다.
"내가 보험 하나쯤 들어주면 좋겠지만, 그게‥‥‥." 가와노는 숱이 줄어든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웅얼거렸다.
내 말이 그 말이야. 하고 쏘아붙이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시즈나는 미소를 지었다.
"다케오 씨에게는 페 끼치고 싶지 않아. 여행 비용도 필요할텐데."
"음, 그렇다니까. 여행 다녀온 뒤에 예금이 얼마나 남아 있느냐가 문제야. 그때도 여유가 있으면 나도 조금쯤 도와주고 싶긴 한데."
무슨 얼빠진 소리야. 하고 시즈나는 내심 분통이 터졌다. 여행 비용이라면 리포트 용지에 일일이 적어서 보여줄 만큼 이미 파악이 다 끝났으면서.
사치라고는 일절 하지 않는다는 가와노는 천만 엔 가까운 예금이 있었다. 그것은 동시에 그가 인색한 사람이라는 증명이기도 했다. 꾸물꾸물하면서 좀체 보험을 들어주지 않는 건 시즈나를 경계하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요즘 가만 보니, 그저 단순히 제 손안의 돈이 나가는 게 싫은 것뿐이었다.
가와노가 시즈나의 뒤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을 그녀는 등 뒤로 느꼈다.
곧바로 한 남자가 두 사람의 테이블 옆에 섰다. 조금 전까지 편의점 앞에 있던 장발의 인물이었다.
"음, 역시." 남자는 시즈나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씨익 웃었다. "유카리 씨잖아?"
앗, 하고 시즈나는 놀라는 소리를 냈다. "야마다 씨‥‥‥!"
"뒷모습으로 딱 알아봤어. 아, 지금 일하는 중?" 남자는 웃는 얼굴 그대로 그녀와 가와노를 번갈아 훑어보았다.
"아뇨, 그런 건 아니구요‥‥‥."
"그래? 이제 슬슬 월말이니 또 책임량에 쫓기는 거 아닌가 했어. 이번 달 책임량은 채웠어?"
"네. 그럭저럭‥‥‥."
저어, 하고 가와노가 말을 섞어왔다.
"친구‥‥‥?"
"아니, 친구는 아니고‥‥‥."
"응. 나는 유카리 씨의 구세주."
남자가 가와노를 향해 말하더니, 그치? 라고 시즈나에게 동의를 청해왔다.
"구세주?" 가와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 저기. 야마다 씨, 우리가 지금 좀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 참이라서요. 죄송하지만 다음에 다시 천천히‥‥‥."
"어, 그래? 자. 그럼 뭐든 힘든 일이 생기면 우선 나한테 연락해. 꼭 해야 돼. 알았지?"
"네. 고마워요."
"지난번 그 유원지. 정말 즐거웠어. 한 번 더 가자구. 응?"
"네. 그럼요."
장발의 남자는 느물느물 웃으며 멀어져갔다. 그 정체를 다 알고 있는데도 저절로 등이 근질근질할 만큼 느물거리는 모습이었다.
"저 사람, 대체 누구야?" 가와노가 물어왔다.
"고등학교 선배야. 길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내가 보험 외판원이고 책임량에 쫓기고 있다고 했더니 그 자리에서 당장 계약을 해줘서‥‥‥."
"음." 가와노는 약간 상처 입은 얼굴이 되었다. "유원지에도 갔었어?"
"답례를 하겠다고 했더니 유원지에 함께 가달라고 하더라구. 그치만 딱 한 번뿐이야."
"이렇게 말하면 실례겠지만, 좀 기분 나쁜 사람이네. 오타쿠 같다고 할까."
"직업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돈은 엄청 많아. 그래서 책임량을 못 채우고 다급할 때는 기댈 수밖에 없어서‥‥‥."
"저런 남자에게?" 그 즉시 가와노의 눈이 험악해졌다. "저런 오타쿠 같은 놈에게 기대겠다고?"
"그래도 막판에 몰렸을 때는 어쩔 수 없어." 시즈나는 차가운 어조로 말하고 홍차를 마셨다.
가와노는 커피 잔에 손을 내밀었다. 잔을 들어 올릴 때, 받침 접시 위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동요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건 좋은 일이라고는 할 수 없어. 데이트까지 하면서 계약을 따내다니, 좀 이상하지."
"데이트가 아냐. 그냥 유원지에 간 것뿐이라니까?"
"그래도 저자는 유카리를 연인이라고 생각하는 거 같았어."
"그렇지 않아."
"아무튼 유카리가 그런 짓을 하는 건 싫어. 앞으로는 하지 마."
"그래도 책임량이‥‥‥." 시즈나는 고개를 숙였다.
가와노가 난폭하게 잔을 내려놓았다. "얼마야?"
"뭐가?" 그녀는 얼굴을 들었다.
"그 책임량 말이야. 앞으로 얼마면 채울 수 있는데?"
명백하게 머리에 피가 불끈 올라온 듯한 그의 얼굴을 보며 시즈나는 저도 모르게 혀를 내밀고 싶어졌다. 그런 마음을 억누르며 그녀는 머뭇거리는 척 입을 열었다.

쌍안경에 잡힌 시점에서 시즈나와 가와노가 나왔다. 시즈나는 남자의 오른팔에 자신의 팔을 끼고 있었다. 그들은 그대로 길을 건너 은행으로 들어갔다.
다이스케는 쌍안경을 눈에서 떼어내고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벌써 6시가 지나고 있었다. 오늘은 한 가지 더 할 일이 있었다. 뒤로 미룰 수 없는 중요한 용건이었다. 중학교 교사의 돈을 뜯어내는 일에 시간과 노력을 빼앗기느라 그쪽 일을 늦출 수는 없었다.
다시 쌍안경을 눈에 댔다. 벤치에 앉아 이런 짓을 하면 보통은 의심을 사겠지만 오타쿠 행색을 하고 있는 한, 아무 문제가 없었다.
이윽고 두 사람이 은행에서 나왔다. 시즈나는 가와노에게 몇 마디 하더니 지나가던 택시를 세웠다. 가와노에게 손을 흔들고 그 차에 올랐다. 가와노는 몹시 아쉬운 듯, 달려가는 택시를 지켜보고 있었다.
다이스케도 일어나 찻길로 나섰다. 서둘러 택시를 향해 손을 쳐들었다. 올라타자마자 아오야마로 갑시다. 라고 말했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시즈나였다.
"야마다입니다." 다이스케가 말했다.
"입금, 완료했어. 한 장 넣었어."
"와우. 대단하네." 다이스케는 머리를 저었다. 한 장이라는 건 100만 엔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쩨쩨한 가와노도 연인을 오타쿠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필사적이었던 모양이다.
"지금부터 니혼바시 쪽 본사에 들러서 포장을 다시 한 다음에 아오야마로 갈게."
"알았어. 이쪽은 미리 가서 사전 조사를 해두지."
전화를 끊은 뒤, 다이스케는 안경을 벗고 긴 머리 가발을 벗었다. 거울을 꺼내 잽싸게 헤어스타일을 다듬었다. 시즈나처럼 '포장'을 새로 하는 데 시간을 들일 여유는 없었다.
아오야마에서 내리자마자 가까운 빌딩 화장실로 뛰어들었다. 종이봉투에서 꺼낸 가방에는 셔츠와 재킷이 들어 있었다. 그걸로 갈아입은 뒤, 벗은 옷이며 변장도구, 종이봉투는 다시 가방에 밀어놓고 화장실을 뒤로했다.
목적지인 가게는 골동품 거리의 도로 변에 있었다. <baron>이라는 간판이 나와 있었다. 다이스케는 도로를 끼고 맞은편 인도에 서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귀에 대고 이야기하는 척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 눈은 <baron>의 입구 쪽으로 향해져 있었다.
한껏 차려입은 남녀가 차례차례 그 가게로 들어갔다. 주 연령층은 이십 대에서 삼십대 중반쯤일까. 커플도 있고 동성 그룹도 있었다. 혼자서 들어가는 사람도 몇몇 눈에 띄었다.
오늘 밤, 그 가게에서 자그마한 파티가 거행될 예정이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다이스케 일행에게 있어 중요한 인물이 나타날 터였다.
시계를 보았다. 곧 8시가 되려는 시간이었다.
한 대의 택시가 멎고 남자 한 명이 내려셨다. 갈색 인조가죽 재킷을 입고 있었다. 그 옆얼굴을 바라보고 다이스케는 손에 들고 있던 휴대전화의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한 남자의 얼굴 사진이 떠올라 있었다. 택시에서 내린 남자와 견주어보았다.
남자는 가게 안으로 사라졌다. 그것을 확인한 다음에 다이스케는 휴대전화를 걸었다.
"네. '계획 아트 사무실'입니다." 고이치의 목소리가 들렸다.
"타깃이 가게에 들어갔어. 동행 없음. 차량은 택시."
"예정대로군. 손님층은 어땠어?"
"다양해. 여자 혼자 들어가도 어색하지 않겠어. 어떻게 할 거야?"
다이스케의 물음에 고이치가 몇 초 동안 침묵했다.
"아냐, 역시 원래 계획대로 가자. 시즈나 혼자서는 도리어 눈에 띄어 함께 잠입해."
"알았음."
전화를 끊고 다이스케가 다시 <baron>을 지켜보고 있으려니 누군가 뒤에서 어깨를 툭 쳤다. 시즈나였다. 회색 원피스에 재킷을 걸치고 있었다. 화장도 고친 것 같았지만, 조금 전보다 약간 얌전한 인상으로 변해 있었다.
"그 메이크업으로 괜찮겠어?"
"불만 있어?"
"아니, 섹시한 맛이 좀 부족하다 싶어서."
"우리의 적은 섹시 메이크업 따위에 질린 사람이야. 자, 가시죠. 가스가이 씨."
"네. 가십시다. 사오리 씨."
자동차의 흐름이 끊기기를 기다렸다가 두 사람은 찻길을 건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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