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전화

유성의 인연/히가시노 게이고 (8)

개미남 | 2019.05.29 22:39:13 댓글: 0 조회: 187 추천: 1
분류추리소설 https://file.moyiza.com/fiction/3927363
유성의 인연/히가시노 게이고


1 - 8.

시계바늘이 정확히 2시를 가리켰을 때, 미나미다 시호가 계단을 올라와 모습을 드러냈다. 가게 안을 휘익 둘러보더니 곧바로 다카야마를 알아보고 빙긋 웃으며 다가왔다.
시호는 엷은 회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 키가 훌쩍 커서 보통 스커트를 입어도 다리 부분의 노출이 많아졌다. 그런 점도 다카야마의 마음에 쏙 드는 것이었다.
"미안, 기다렸어?"
"아니, 나도 지금 막 왔어. 아직 주문도 안 했고."
"다행이다."
시호는 숄더백을 어깨에서 내리며, 일단 다카야마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뭔가 생각이 난 듯 다시 일어섰다.
"우리, 옆에 나란히 앉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
"아, 그런가?"
"우리 둘이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니까."
그러더니 그녀는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다카야마 쪽으로 건너와 바로 옆자리에 앉았다. 꽃 같은 향기가 그의 콧구멍을 간질였다.
시호는 웨이터를 불러 로열 밀크티를 주문했다. 다카야마는 커피로 부탁했다.
"좀 더 비싼 걸로 주문할 것이지."
시호가 말했다.
"왜?"
"어차피 그쪽에서 내줄 거잖아? 사양할 거 없어. 우리가 귀한 시간을 내준 건데, 뭐."
"그야 그렇지만‥‥‥."
다카야마는 메뉴판을 들어 가격을 확인했다. 분명 시호가 주문한 로열 밀크티는 커피보다 값이 비쌌지만, 그 차이는 겨우 2백 엔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 돈에 무슨 큰 이익을 본 것처럼 들뜨는 그녀의 서민적인 감각 또한 다카야마를 기쁘게 하는 것이었다.
"오늘은 정말 미안해."
시호가 손을 맞댔다.
"이상한 일에 끌어들여서."
"아, 신경 쓸 거 없어. 은행 금리가 예나 이제나 너무 낮아서 어떻게든 좀 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니까 마침 잘됐어."
"그렇게 말해주니 한결 마음이 놓이네. 나, 히사노부한테만은 절대 신세지고 싶지 않거든."
"무슨 그런 섭섭한 소리를."
다카야마는 컵에 손을 내밀어 목의 갈증을 축였다. 그녀가 자신을 성씨가 아니라 이름으로 친하게 불러주면 아직도 여전히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이었다.
"그나저나, 늦네? 우리 쪽을 기다리게 하다니. 머리가 좀 어떻게 된 거 아냐?"
시호는 그렇게 말한 뒤, "어라!" 하는 소리를 흘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몇 미터 앞의 테이블로 다가갔다. 그곳에 갈색 정장을 입은 남자가 등을 보이고 앉아 있었다. 그 남자 앞으로 돌아가더니,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다.
"선배, 여기서 뭐하고 있어? 우리, 아까부터 저기서 기다리고 있었단 말이야."
엇, 하면서 남자는 돌아보았다. 다카야마를 알아보자마자 다급하게 일어섰다.
"아아, 이거 참. 큰 실례를 했네."
남자는 가방을 겨드랑이에 끼고 두 손으로 아이스커피 잔과 계산서를 들고 다카야마 쪽 자리로 옮겨왔다.
"선배, 언제부터 와 있었어?"
"한 20분 전쯤인가?"
"응. 분명 내가 왔을 때, 벌써 앉아겠셨던 것 같네."
다카야마는 말했다.
"그랬어요? 이것 참. 알아보지 못해 정말 미안합니다. 미나미다와 함께 오실 거라고만 생각했거든요."
시호의 지적에 남자는 스스로 한심하다는 듯한 표정을 했다.
"정말로 이거 참, 면목이 없네."
"그러다 은행 책임량도 못 채우는 거 아니야?"
"아이, 그런 말 말라니까."
남자는 선 채로 양복 안 호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냈다.
"저어, 미나미다에게 들으셨을 테지만,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그의 명함에는 '산쿄은행 니혼바시 지점 영업부 고미야 야스시'라고 찍혀 있었다.
다카야마도 산쿄은행에 계좌를 갖고 있었다. 시호가 그것을 기억하고 있었는지, 이번 일을 부탁해온 것이었다. 대학 선배가 책임량을 채우지 못해 난처해하고 있으니 좀 도와줬으면 좋겠다는 이야기였다.
"이번 일, 정말 고맙습니다. 큰 도움이 되겠습니다."
고미야는 꾸벅꾸벅 몇 번이나 고개를 숙였다.
"아무튼 좀 않는 게 어때? 남들 눈에 띄잖아."
시호가 말했다.
"그럼, 잠깐 실례합니다."
고미야는 그제야 자리에 앉았다.
그는 은행 영업사원의 이미지를 그대로 그려놓은 듯한 외모를 하고 있었다. 머리는 단정하게 갈라 빗질했다. 금테 안경은 너무 패셔너블하지 않도록 주의했고 텍타이 색깔도 수수했다. 그리 큰 키도 아닌 것 같은데 유난히 앉은키가 높게 느껴지는 건 등을 꼿꼿이 세우고 앉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상대가 착실해 보이는 인물이어서 다카야마는 마음이 놓였다. 누군가를 처음 만나 인사를 나누는 일에 그는 그다지 능숙한 편이 못 되었다.
"고미야 선배. 아직 자세한 이야기는 안 했어. 아니, 그보다 나부터가 우선 제대로 이해를 못 했거든. 그러니까 좀 더 자세히 설명해줬으면 좋겠는데."
"아, 그건 물론이지. 지금부터 설명을 올리겠습니다."
고미야는 가방에서 한 장의 서류를 꺼내 다카야마와 시호 앞에 놓았다.
"그러니까 이번에 안내해드릴 상품은 미국 달러 계약채권이라는 것으로서, 이건 유럽 금융공사라는 곳에서 운용하는 겁니다. 기간은 약 2년이고 연 이율은 미 달러 베이스로 4.3퍼센트가 나와 있습니다."
"2년이라면, 그동안에는 해약을 못하는 거야?"
시호가 물었다.
"해약할 수는 있지만, 그런 경우에는 원금에 대한 보장이 없어. 이건 결국 고객이 맡겨준 돈을 여기저기 투자해서 그걸로 이익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투자가 제대로 잘 안 되었을 때는 마이너스가 되는 일도 있어. 그래도 상환일까지 계속 맡겨주었을 경우에는 원금과 이 정도의 이자는 보증하겠다. 그런 얘기야."
"그 유럽인지 어딘지의 금융공사는 괜찮은 데야? 혹시 망하거나 하지 않아?"
시호가 의심스러운 듯한 어조로 말했다.
"절대로 망하지 않는 기업이라는 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겠지만‥‥‥."
그렇게 말하고 고미야는 수첩을 펼쳤다.
"음, 이런 기업들에는 등급이라는 게 있어서‥‥‥."
무디스에서 내린 등급은 Aaa이고, S&P에서는 AAA가 나왔다고 고미야는 말했다. 다카야마는 뭐가 뭔지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했다. 아무튼 틀림없는 회사라는 이야기인 모양이었다.
시호는 다시 몇 가지 질문을 했다. 거기에 대해 고미야는 하나하나 꼼꼼히 대답해나갔다. 대학 선배랍시고 은근히 대접을 받으려는 태도도 없고, 그러기는커녕 후배인 그녀에게까지 공손한 어조로 나오는 성실성에 다카야마는 호감을 느꼈다. 이런 인물에게 맡기는 것이라면 괜찮겠다. 하고 생각했다. 실제로 두 사람의 대화만을 들어서는 이게 어떤 상품인지 정확하게 알 수도 없었다. 그는 경제에 관해서는 무지했다.
"자기, 어떻게 할 거야? 지금 이야기를 들어본 것만으로는 괜찮을 것 같기는 한데."
시호가 다카야마에게 물어왔다.
"음, 괜찮겠는데? 너한테 맡길게."
다카야마는 대답했다. 너한테 맡긴다는 말에는 시호를 파트너로 생각한다는 자신의 감정을 실제로 맛보게 해주는 뉘앙스가 담겨 있어서 그는 흐뭇한 기분이었다.
"그거, 최저 2백만 엔부터라고 했지?"
시호가 확인했다.
"그렇게 해주면 고맙지."
"전화로도 말했지만, 나는 50만 엔밖에 없어. 그래서 그 나머지만 이 사람에게 들어달라고 할 생각인데, 그런 것도 가능해?"
"물론 가능하지. 다만 명의는 한 사람으로 해야 하는데?"
"그럼 이 사람 명의로 해줘."
"알았어. 단지 그럴 경우, 2년 뒤에 상환할 때는 다카야마 씨의 계좌에 전액이 들어가게 되는데, 그건 문제가 없겠지?"
고미야가 다카야마와 시호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며 확인했다.
"전혀 문제없어."
시호가 즉시 대답했다.
"나중 일은 우리끼리 해결할 거야. 그때는 우리, 어떻게 되어 있을지 모르거든. 어쩌면 내 예금이 전부 히사노부의 계좌로 옮겨가 있을지도."
그녀의 말에 다카야마는 체온이 급상승하는 것을 느꼈다. 자기도 모르게 그녀의 옆얼굴을 쳐다보았지만, 시호는 별로 중요한 말을 했다는 표정도 없이. 그치? 라고 동의를 청해왔다.
음, 그렇지. 라고 대답하는 다카야마의 목소리는 한껏 들떠 있었다.
"그러면, 이런 데서 좀 미안하긴 하지만. 거래를 하시는 걸로 하죠."
고미야는 가방 안에서 다양한 서류들을 꺼내놓았다.
우선 계약서에 사인하고 도장을 찍었다. 나아가 은행의 지불 청구서에도 똑같이 했다. 그런데 거기에 금액을 써넣을 때가 되어서 다카야마는 얼굴을 들었다.
"저, 웬만하면 내가 전액을 다 낼까요?"
"무슨 말씀이신지?"
"2백만 엔, 전부 내 예금에서 내도 괜찮거든요. 그렇게 하면 이런 귀찮은 짓은 하지 않아도 될 텐데."
옆자리의 시호를 보았다. 그녀도 지불 청구서에 기입하고 있었다. 그녀의 청구액은 50만 엔이었다.
"그건 뭐, 나야 괜찮습니다만‥‥‥."
고미야는 슬쩍 시호 쪽의 눈치를 보았다.
"아니, 그건 안 돼."
하지만 시호는 엄격한 어조로 말했다.
"히사노부에게만 페를 끼치고 싶지는 않아. 내가 들자고 한 거니까 나도 돈을 낼 거야."
"그래도 이건‥‥‥."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내가 속이 개운하질 않다니까. 사실은 반반으로 하고 싶었단 말이야."
다카야마는 쓴웃음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 고집이 여간 아니라니까."
"고집이 아냐, 돈 문제에 정확한 거지."
그러면서 그녀는 다시 서류 기입에 들어갔다.
서류 작성을 마친 뒤, 다카야마와 시호는 예금통장을 고미야에게 건넸다. 고미야는 수령증에 사인해서 두 사람에게 건네주었다.
"20분쯤 기다려주시겠습니까? 금방 수속하고 올 테니까요."
고미야가 가방을 안고 일어섰다.
"선배, 다녀와~."
시호가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고미야는 계단으로 향했지만 금세 되돌아왔다. 죄송하다는 듯한 얼굴로 다카야마를 바라보았다.
"중요한 걸 잊어버릴 뻔했네요. 오늘, 보험증은 가지고 오셨나요?"
"건강보험증 말이죠? 시호가 일러준 대로 가져왔지요."
다카야마는 상의 호주머니에 넣어두었던 건강보험증을 내밀었다.
"그런 게 왜 필요한 거야?"
시호가 불만스러운 듯 물었다.
"미안해. 요즘 이래저래 출금 수속이 복잡해졌거든."
고미야가 일어나 나간 뒤, 시호는 오렌지 주스를 주문했다.
"히사노부도 뭔가 마시지 그래?"
"나는 됐어, 아직 커피가 남았어."
"정말 미안해, 무리한 부탁해서."
"괜찮다니까, 나도 할 만해서 한 거야. 이거, 꽤 괜찮은 거 같아. 예금을 그냥 놀려두는 것도 아까웠는데."
"고마워."
시호는 미소지었다.
서로 알게 된 지 아직 한 달도 안 되었지만 이번 일로 두 사람의 거리가 성큼 줄어든 듯한 느낌을 다카야마는 실감할 수 있었다. 물론 프로포즈까지 하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생각하지만, 지금 이 상태를 계속 유지해나간다면 반드시 바람직한 결과가 나올 것이라는 확신과도 같은 예감이었다.
이런 미인이 내 사람이 되다니‥‥‥. 옆에서 오렌지 주스를 마시는 시호를 다카야마는 바라보았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왜 그래?"
시선을 알아차린 듯 시호가 눈을 깜빡였다.
"아니, 아무것도 아냐."
다카야마는 눈을 돌렸다. 너한테 흠뻑 빠져 있었어. 라는 등의 대사를 술술 입 밖에 낼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고미야가 돌아왔다. 이마에 땀이 맺혀 있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우선은 통장을 돌려드리죠. 확인해주세요."
가방에서 꺼낸 두 개의 통장을 시호와 다카야마 앞에 각각 내려놓았다.
다카야마가 통장을 들고 내용을 확인했다. 150만 엔이 인출되어 있었다.
"그리고 보험증은 여기 있습니다. 정말 고마워요. 일주일쯤 뒤에 다카야마 씨에게로 증권이 우송될 겁니다. 만일 뭔가 문제가 있으시면 제 쪽으로 연락주세요."
고미야는 공손한 어조로 말했다.
"선배, 책임량은 무사히 달성한 거야?"
시호가 물었다.
그러자 고미야는 뺨이 환하게 풀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덕분에 살았다. 정말."
"이제 다시는 나한테 부탁하기 없기야?"
"응, 미안해. 이 은혜는 꼭 갚을게."
고미야는 테이블의 계산서를 들고 일어섰다.
"그러면 저는 이만, 오늘 정말로 고마웠습니다. 앞으로도 산쿄은행, 잘 부탁합니다."
몇 번이나 머리를 숙이고 나가는 고미야를 다카야마는 웃으며 눈으로 배웅했다.
"정말 선량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드는군."
그는 말했다.
"그러니 책임량도 못 채우는 거야. 매사에 강하게 밀어붙이지를 못하는 거 같아."
시호는 문득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고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이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어? 나, 가 봐야겠어."
"근무시간에 나온 거야?"
"응, 이제부터 회의가 있어. 자기는 천천히 있다가 와도 되는데."
"아니, 나도 나갈 거야."

커피숍 바로 앞길에서 다카야마 히사노부는 택시를 탔다. 그를 배웅한 뒤, 그녀는 걸음을 옮겼다. 잠시 뒤 숄더백에 들어 있던 휴대전화가 울렸다.
"네."
"고객의 기분은 어떠셔?"
"아주 신났어. 노 프라블럼."
그녀는 휴대전화에 대고 말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거리의 대각선 맞은편에 아리아케 다이스케의 모습이 보였다. 갈색 정장에 금테 안경. 은행 영업사원을 연출할 때의 차림새였다.
"한 달에 150만 엔이라. 이거 경기가 영 시원찮은데?"
"어쩔 수 없지. 고이치 오빠가 그 정도만 하라고 지시했는데 어쩌겠어? 추가분 50만 엔, 어떻게든 뜯어낼 생각이니까, 됐어."
"음, 너라면 충분히 가능하지. 그 사람, 너한테 완전히 푹 빠진 것 같기도 하고."
"그야 당연하지. 나를 뭘로 보는 거야?"
다이스케가 느물느물 웃는 게 보였다.
"자, 그럼 나중에 보자."
"응, 그래."
그렇게 말하고 시즈나는 전화를 끊으며 다이스케를 향해 슬쩍 손을 쳐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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