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8권 33~35 (8권 끝 + 완결)

나단비 | 2024.04.20 13:50:05 댓글: 2 조회: 865 추천: 1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62676
33
승리






릴라가 중얼거렸다.
“바람은 스산하고, 하늘은 암울하기만 한 날이야!”
어느 일요일 오후, 정확히 말하면 10월 6일이었다. ‘잉글사이드’ 거실에는 난로가 피워졌다. 난로 불꽃은 몹시 사나운 바깥 날씨에 대항하듯 활활 세차게 타오르며 제 소임을 다했다.
“오늘은 10월이 아니라 한 해 중에 가장 나쁜 날씨를 보이는 11월 같아.”
거실에는 또다시 수잔을 용서한 소피아가 와 있었고, 일요일에는 보통 남의 집을 방문하지 않는 마틴 클로 부인도 수잔의 류머티즘 약을 얻으러 와 있었다. 물론 그 방법이 의사에게 약을 얻는 것보다 싸게 먹히니까.
“올겨울에는 바람이 많이 불 것 같아 걱정이야. 들쥐가 연못가에 엄청나게 큰 집을 짓고 있어. 그건 바람이 많이 불 거라는 징조거든.”
소피아가 예언했다.

“어머나, 세상에, 저 아이는 무척 커버렸네! 그나저나 저 아이의 아버지는 언제쯤 오지?”
소피아가 아이가 자란 것이 무슨 불행한 일이나 된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다음 주에 와요.”
릴라가 대답했다.
“계모가 저 가여운 아이를 구박이나 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먼. 하지만 그런 일을 어떻게 기대해. 어쨌거나 이 아이는 어떤 곳에 가나 여기서 받았던 대접이랑은 다른 대접을 받게 될 거야. 릴라가 저 아이의 손과 발이 되어 돌봐주었잖아. 아이 버릇을 다 망쳐놓았어. 하긴 제가 그렇게 자랐으니까.”
소피아가 또다시 한숨을 쉬며 말했다.
릴라는 웃으며 짐스의 볼과 곱슬머리에 입을 맞추었다. 릴라는 짐스가 아주 밝고 명랑한 성격을 가졌을 뿐 제멋대로 구는 아이는 아니란 것을 잘 알았다. 릴라가 웃고 있기는 해도 걱정이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앤더슨 부인을 생각할 때마다 그 부인이 어떤 사람일지 걱정이었다.
‘짐스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누구에게도 짐스를 보낼 수 없어.’
릴라는 그렇게 마음먹고 있었다.
“비가 내릴 모양이야. 올가을에는 이미 비가 지겹게 왔는데. 농사짓는 사람들이 무척 힘들 거야. 내가 젊었을 때는 이런 일이 없었지. 10월이면 날씨가 무척 좋았는데. 그렇지만 계절도 이제는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어.”
소피아의 그 음울한 목소리를 가리면서 전화벨이 울렸고, 거트루드 올리버가 받았다.
“그렇습니다. 네, 뭐라고요? 정말인가요? 공식적인 발표인가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거트루드 올리버는 극적인 동작을 취하며 방 안의 사람들을 향해 돌아섰다. 그녀의 검은 눈이 빛나고 어두웠던 얼굴이 환해졌다. 갑자기 두껍게 낀 구름 사이로 환한 해가 고개를 내밀었고, 창밖으로 보이는 단풍나무 숲을 붉게 물들였다. 그 반사된 빛이 거투르드 올리버를 감싸고 있었다. 이 세상 것이 아닌 불꽃에 둘러싸인 거트루드는 신비하고 환상적인 의식을 행하는 여신처럼 보였다.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강화를 제의했대요.”
거트루드가 말했다.
릴라가 잠시 정신이 이상해지기라도 했는지 손뼉을 치며 펄쩍펄쩍 뛰었다. 그러고는 울었다 웃었다 하며 온 방 안을 춤추고 돌아다녔다.
“앉아라, 릴라.”
클로 부인이 나무랐다.
클로 부인은 어떤 일에도 흥분한 적이 없으며, 그 때문에 인생을 살아오면서 수많은 고통과 즐거움을 많이도 놓쳤다.
“전 지난 4년 동안 절망하고 걱정하며 방 안을 얼마나 돌아다녔는지 몰라요. 이제 기쁨으로 돌아다니도록 내버려둬 주세요. 지금 이 순간을 맞고 보니 그 길고 괴로웠던 세월을 살아온 보람이 있었네요. 이제 앞으로 그 시간을 뒤돌아보면서 살아가는 것도 가치 있을 거예요. 아줌마, 우리 국기를 달아요. 그리고 이 소식을 온 글렌 사람들에게 전화로 알려줘야지요.”

“이제 설탕을 쓰고 싶은 만큼 마음대로 써도 돼?”
짐스가 간절하게 물었다.
평생 잊을 수 없는 저녁이었다. 이 소식이 퍼지자 흥분한 사람들이 마을에서 뛰어나와 ‘잉글사이드’로 몰려들었다. 목사관 사람들도 와서 저녁 먹을 때까지 머물렀고, 모든 사람들이 한꺼번에 말을 했지만 서로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소피아는 독일군과 오스트리아군이 정말로 강화협정을 맺은 것이 아니라 이것도 무슨 꿍꿍이가 있어 수를 쓰는 거라고 말했지만 아무도 소피아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이 일요일이 3월의 그 끔찍했던 날을 보상해주었어요.”
수잔이 말했다.
“난 정말로 평화가 찾아오면 모든 일이 그저 밋밋하고, 맥이 빠진 것처럼 흥미 없이 느껴지지 않을까 생각했어. 4년 동안이나 두려움과 불안에 떨고, 끔찍한 패배를 겪고, 깜짝 놀랄 만한 승리를 경험하는 등 격한 감정 속에 살았으니까. 매일 우편물이 와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니 그 얼마나 이상하고 축복된 삶이야?”
거트루드 올리버는 릴라를 보며 꿈꾸는 듯이 말했다.
“당분간은 여전히 두려워해야 할 거예요. 아직 몇 주일은 더 끔찍한 일들이 일어날 수도 있어요. 나는 벌써 흥분된 기분이 가셨어요. 승리하기는 했지만, 너무나 값비싼 대가를 치렀어요!”
릴라가 말했다.
“자유를 얻은 대가로서는 너무 비싼 값도 아니었어.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릴라?”

거트루드 올리버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럼요.”
릴라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릴라는 프랑스의 어느 전쟁터에 서 있는 작고 하얀 십자가를 보고 있었다.
“맞아요. 살아 있는 우리들이 그 가치를 보여주고, 우리의 약속을 지킨다면요.”
“우리는 약속을 지킬 거야.”
거트루드 올리버는 말했다.
별안간 미스 올리버가 일어섰다. 탁자를 둘러싸고 앉은 사람들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그 침묵 속에서 거트루드 올리버는 월터의 유명한 시 <피리 부는 사나이>를 낭송했다.
낭송이 끝나자 메러디스 목사가 일어나서 잔을 높이 들었다.
“말 없는 군대를 위해 피리 부는 사나이의 부름에 따른 젊은이들을 위해 건배합시다. 우리의 내일을 위해 그들은 그들의 오늘을 바쳤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값진 승리를 얻었습니다!”




34
수잔의 신혼여행






짐스는 11월 초 ‘잉글사이드’를 떠났다. 릴라는 짐스를 보내며 눈물을 펑펑 쏟았지만 부담을 던 기분이기도 했다. 짐 앤더슨 부인, 곧 짐 앤더슨의 두 번째 부인은 상냥한 사람이었다. 짐 앤더슨이 어쩌다 그런 행운을 잡았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부인의 얼굴은 장밋빛이고 파란 눈이 참 사람 좋아 보였으며 제라늄 꽃잎처럼 동그랗고 깔끔한 인상이었다. 릴라는 이 부인을 보자마자 짐스를 맡겨도 안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앤더슨 부인은 진심으로 말했다.
“나는 어린아이를 무척 좋아해요. 그리고 난 아이들을 많이 길러봤어요. 내가 동생들을 여섯이나 돌봤거든요. 짐스는 참 귀여운 아이예요. 어쩌면 아이를 이렇게 건강하고 예쁘게 키워놓았는지 참으로 놀라워요. 나도 짐스를 내 자식처럼 귀여워하고 잘 돌봐 줄 거예요. 우선은 짐이 열심히 일을 하도록 해야지요. 짐은 훌륭한 일꾼이지만 열심히 일하도록 감시하고 그 사람이 버는 돈을 잘 관리할 사람이 필요해요. 우리는 여기 마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작은 농장을 하나 빌렸어요. 거기서 자리를 잡을 거예요. 짐은 영국에서 살자고 했지만 내가 싫다고 했어요. 난 언제나 다른 나라에 나가 살아보고 싶었거든요. 그리고 캐나다가 가장 좋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우리와 가까운 곳에서 살게 되었다니 무척 기뻐요. 짐스가 여기 자주 놀러 오게 해주실 거죠? 짐스가 무척 보고 싶을 거예요.”
“그럼요. 아가씨는 저 사랑스러운 아이를 자주 만나게 될 거예요. 짐도 나도 아가씨가 짐스를 얼마나 잘 키워주었는지 잘 알고 있어요. 우리가 그 은혜를 저버리는 일은 없을 거예요. 짐스는 언제라도 여기 올 수 있어요. 아가씨가 보고 싶을 때는 언제라도 짐스를 볼 수 있고말고요. 그리고 나도 짐스를 교육하는 일로 아가씨가 조언을 해준다면 언제나 귀담아듣겠어요. 짐스는 그 누구보다도 바로 아가씨 아이예요. 나는 짐스도 그 점을 잊지 않도록 할 거예요.”
그렇게 짐스는 떠났다. 수프 단지와 함께. 하지만 이번에는 그 안에 담겨서는 아니었다. 그런 다음 휴전 소식이 들려왔다. 글렌 세인트 메리는 미친 듯이 들떴다. 그날 밤 마을 사람들은 큰 축하의 횃불을 밝혔고 카이저의 형상을 만들어 불에 태우는 의식을 치렀다. 어촌 마을 소년들은 10킬로미터에 이르는 모래 언덕의 풀을 태워 거대한 불꽃이 일렁이게 했다. ‘잉글사이드’의 자기 방을 돌아다니며 릴라는 미친 듯이 웃어댔다.
“나는 지금부터 가장 숙녀답지 못하고 용서받지 못할 일을 하려고 해요. 난 이 방에서 이 모자가 형태가 다 망가져 버릴 때까지 걷어차고 다닐 거예요. 내가 살아 있는 한 다시는 이런 초록색 모자를 두 번 다시 쓰지 않을 거라고요.”
“릴라는 자기가 한 약속을 훌륭하게 잘 지켜냈어.”
미스 올리버가 웃으며 말했다.

릴라는 기쁜 듯이 모자를 걷어차며 말했다.
“제가 훌륭했던 게 아니에요. 순전히 고집이었죠. 전 이 모자가 무척 부끄러웠어요. 하지만 엄마한테 오기를 부린 거죠. 그저 우리 엄마에게 보여주려고 그랬던 거라고요. 아주 못된 심보에서 나온 행동이었죠! 하지만 결국 내 결심을 끝까지 지키고 내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었어요! 아, 올리버 선생님, 제가 다시 아이가 된 기분이 들어요. 아무 생각도 없고 바보짓만 하는 아이요. 제가 11월은 가장 싫은 달이란 말을 한 적이 있나요? 제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어요. 11월은 일 년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달이에요. ‘무지개 골짜기’에서 울리는 방울 소리를 들어보세요. 방울 소리가 저렇게 똑똑히 들린 적이 없어요. 평화와 새로운 행복을 위해 울리는 방울 소리죠. 이제 우리는 정답고 포근하고 달콤하고 제정신인 것들을 다시 누릴 수 있어요. 올리버 선생님, 지금 전 제정신이 아니에요. 그런 척하지도 않겠어요. 오늘은 온 세계가 미친 듯 발작을 일으키고 있어요. 모두가 곧 차분해질 거예요. 그리고 믿음을 갖고,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기 시작하겠죠. 하지만 오늘만은 그저 미친 듯 기뻐하기로 해요.”
햇빛이 반짝이는 밖에서 수잔이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들어와 보고했다.
“하이드 씨가 갔어요.”
“갔다니요! 죽었다는 말인가요?”
“아니에요, 사모님. 죽지 않았어요. 하지만 다시는 그 고양이를 볼 수 없을 거예요. 난 알아요.”
“그런 이상한 말은 하지 말아요, 수잔. 고양이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거죠?”
“글쎄요, 사모님. 그 고양이가 오늘 오후에 뒷문 계단에 앉아 있었어요. 휴전협정이 이루어졌다는 소식이 온 직후였죠. 그런데 그 고양이는 하이드 씨 중에서도 가장 고약한 하이드 씨가 되어 있더군요. 정말 무서운 모습이었어요. 그때 갑자기 브루스가 죽마(竹馬)를 타고 부엌 모퉁이를 돌아왔어요. 그 애는 요즘 죽마 타는 법을 배우고 있거든요. 나한테 얼마나 잘 타는지 자랑하려고 온 거죠. 하이드 씨가 그걸 보더니 뜰 울타리를 훌쩍 뛰어넘어 가버리더군요. 귀를 뒤로 눕히고 아주 쏜살같이 달려 단풍나무 숲으로 사라져버렸어요. 그렇게 겁에 질린 모습은 처음 보았어요, 사모님. 그 뒤로 돌아오지 않았어요.”
“고양이는 돌아올 거예요, 수잔. 무서운 생각이 들어 달아났지만 돌아올 거예요.”
“이제 알게 되겠죠, 사모님. 곧 알게 될 거예요. 휴전협정은 이루어졌어요. 구레나룻 난 보름달은 어젯밤에 뇌졸중을 일으켜 마비가 되었다죠. 그 사람에게 심판이 내린 거예요. 나야 전지전능한 하느님의 뜻은 모르지만 누구나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나름대로 생각이야 해볼 수는 있지요. 구레나룻 난 보름달이나 하이드 씨는 이제 글렌 세인트 메리에서 볼 수 없을 거라고요, 사모님. 내가 장담하지요.”
하이드 씨는 정말로 나타나지 않았다. 단순히 놀라 도망쳤는데 집을 그리 오래 떠나 있을 리 없어서 ‘잉글사이드’ 식구들은 고양이가 총에 맞았거나 독약을 잘못 먹었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수잔은 그 고양이가 ‘제 갈 곳으로 갔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릴라는 위엄 있게 황금빛으로 빛나던 그 고양이가 그리웠다. 유순한 지킬 박사의 모습이거나 하이드 씨가 되어 있거나 그 고양이가 좋았다.
“자, 이제 가을 대청소도 끝냈고, 야채 운반용 이륜차도 다 쓰고 지하실에 넣어놨으니, 평화를 맞은 기념으로 난 신혼여행을 떠나야겠어요.”

수잔이 말했다.
“신혼여행이라고요, 수잔?”
“그래요, 사모님. 신혼여행이요. 내가 남편을 맞을 일이야 없겠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을 다 손해 봐야 한다는 법은 없잖아요. 그래서 신혼여행을 갈 생각이에요. 샬럿타운에 사는 오빠 가족을 찾아가 보려고 해요. 올케가 가을부터 줄곧 앓고 있는데 죽을지 살지 아무도 모른답니다. 올케는 무슨 일을 하든 일을 다 끝낼 때까지는 절대로 남에게 말을 해주지 않는 성미거든요. 우리 집안에서 올케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도 다 그 때문이에요. 하지만 한번 병문안을 다녀오는 것이 도리죠. 지난 20년 동안 시내에서 하루 이상 묵어본 적도 없고, 그리고 사람들이 영화라는 것이 재미있다고 하던데 그 영화도 하나 보아두는 게 좋을 것 같고요. 나만 영화도 모르는,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 되고 싶진 않거든요. 그래도 그 영화에 빠져버리는 일은 없을 거예요, 사모님. 그래서 휴가를 주실 수 있다면 2주일 동안만 집을 비웠으면 해요.”
“그럼요. 수잔은 천천히 여유 있게 쉴 자격이 있어요. 한 달 동안 쉬었다가 오세요. 신혼여행이면 그 정도는 되어야지요.”
“아니에요, 사모님. 2주일이면 충분해요. 그리고 적어도 크리스마스가 되기 3주일 전에는 돌아와야지요. 올해는 크리스마스다운 크리스마스를 보내야 하잖아요. 우리 애들이 크리스마스에는 모두 돌아올 수 있을까요?”
“아니요. 못 돌아올 거예요, 수잔. 젬도 셜리도 봄 전에는 돌아오지 못한다는 편지를 보내왔어요. 셜리는 한여름이나 되어야 돌아올 수 있대요. 하지만 칼 메러디스는 곧 집에 온다는군요. 낸과 다이도 오구요. 다시 한 번 성대하게 축하잔치를 벌여요. 이번에는 전쟁 첫해 크리스마스에 그랬던 것처럼 모두의 자리를 마련해요. 그래요, 모두의 자리요. 영원히 비어 있을 내 소중한 아들의 의자도 다른 사람들 것과 똑같이 준비하기로 해요, 수잔.”
“내가 그 아이 자리를 잊어버릴 리 있겠어요, 사모님.”
수잔은 눈물을 닦으며 신혼여행 짐을 싸러 방에서 나갔다.





35
릴라, 나의 릴라!






칼 메러디스와 밀러 더글러스는 크리스마스 바로 전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글렌 세인트 메리 마을 사람 전부가 역으로 마중을 나갔다. 손수 만든 환영 플래카드를 내걸고 로브리지에서 브라스밴드까지 불러왔다. 밀러는 목발을 짚었는데도 씩씩해 보였고 온몸에서 빛을 발하는 듯했다. 떡 벌어진 어깨하며 목에 건 훈장에다 어찌나 늠름한지 미스 코넬리아는 그가 혈통상 약점이 좀 있더라도 메리와 약혼한 사실을 묵인해주기로 마음먹었다.
메리는 무척이나 우쭐한 기분이었다. 특히나 카터 플래그가 밀러를 수석 점원으로 채용했을 때에는 더욱더 의기양양한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아무도 그런 메리를 나쁘게 여기지 않았다.
메리는 릴라에게 말했다.
“물론 이제 우리는 농사일을 할 수 없어. 하지만 밀러는 적응되기만 하면 가게 점원 일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한대. 그리고 카터 플래그 씨가 알렉 데이비스 부인보다 훨씬 더 좋은 주인이기도 하고. 우리는 가을에 결혼할 거야. 옛날 미드 씨네가 살던 집에서 살기로 했어. 내닫이 창문과 맨사드 지붕이 있는 그 집. 난 전부터 그 집이 글렌 마을에서 가장 멋지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그 집에 살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어. 물론 세를 얻어 사는 거지만. 모든 일이 우리 뜻대로 잘되고, 또 플래그 씨가 밀러를 동업자로 해준다면 언젠가는 우리 집이 될 수도 있겠지. 봐, 나도 이제 출세했어. 그렇지 않니? 옛날의 나를 생각하면 말이야. 난 상점 주인 부인이 되고 싶다는 야망을 품은 적은 없지만 밀러는 아주 야심가란다. 나는 아내로서 밀러를 잘 내조해줄 생각이야. 밀러는 프랑스 아가씨 중에서는 눈길을 두 번 이상 줄 만한 사람을 보지 못했대. 그곳에 가 있는 동안에도 줄곧 나만 생각했다지 뭐니.”
제리 메러디스와 조 밀그레이브는 1월에 돌아왔다. 그 겨울 내내 글렌 마을과 그 근방에서 전쟁터로 나갔던 젊은이들이 하루에 둘씩 셋씩 짝지어 돌아왔다. 나갈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돌아온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다행히 부상을 면한 젊은이도 예전의 그 젊은이는 아니었다.
어느 봄날, ‘잉글사이드’ 뜰에 피어난 수선화가 바람에 흔들리고 ‘무지개 골짜기’의 개울둑이 흰색과 보라색 제비꽃으로 덮였을 때였다. 그 한가로운 봄날처럼 완행열차 한 대가 느릿하게 글렌 역으로 들어왔다. 그 시각 기차로 글렌 마을에 오는 승객은 없어서 기차를 맞은 사람은 새로 부임한 역장과 검은색과 누런색이 뒤섞인 작은 개 한 마리뿐이었다. 이 개는 이제 4년 반을 이 역에 머물며 글렌 세인트 메리 역으로 들어오는 모든 기차를 맞이했다. 그렇게 먼데이는 수천 대의 기차를 맞이했지만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렸던 주인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기다렸고, 그 눈에 희망이 사라진 적도 없었다. 그래도 마음이 가끔씩 약해지는 때는 있었으리라. 이제 이 개도 늙었고 관절염이 생겼다. 기차가 가버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갈 때마다 개의 발걸음은 힘이 없었다. 이제는 껑충껑충 뛰는 법도 없이 고개를 떨어뜨리고 느릿느릿 걸었다. 그전에는 의기양양하게 꼬리를 빳빳이 들고 다녔건만 지금은 꼬리에도 힘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이번 기차에서는 손님이 딱 한 사람 내렸다. 키가 호리호리한 젊은이로 빛바랜 중위 군복을 입었고, 자세히 보면 한쪽 다리를 약간 절었다. 얼굴은 구릿빛으로 그을렸고, 앞이마에 흐트러진 붉은 고수머리에는 흰 머리칼도 몇 가닥 섞여 있었다. 새로 부임해온 역장은 관심 있게 이 젊은이를 바라보았다. 그는 지금까지 군복 차림의 병사들이 기차에서 내리는 광경을 자주 보아왔다. 어떤 군인은 많은 사람들이 마중을 나와 떠들썩하게 환영을 받았으나, 어떤 군인은 돌아온다는 소식을 알리지 않아 이 군인처럼 조용히 내려왔다. 하지만 지금 이 군인의 태도와 모습에서는 뭔지 모를 위엄이 느껴져 역장은 마음이 끌렸다. 도대체 누구일까?
이 역장 곁으로 검고 누런 얼룩무늬 개가 휙 하니 지나갔다.
먼데이가 몸이 뻣뻣해졌고, 먼데이가 관절염이 생겼고, 먼데이가 늙었다고? 절대로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지금 먼데이는 다시 어린 강아지가 되었다. 너무너무 기뻐서 생명이 다시 소생한, 미칠 듯 행복한 강아지가 되었다.
먼데이는 그 키 큰 군인에게 덤벼들며 짖었는데, 너무 기뻐 소리가 그만 목에 딱 걸려버렸다. 먼데이는 뒹굴고 몸부림치며 그야말로 광적으로 환영하는 마음을 나타냈다. 군인의 군복 다리에 기어오르려다가는 미끄러지자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 작은 몸이 온통 부서져라 땅바닥에 몸을 비벼댔다. 개는 군인의 장화를 핥았다. 중위가 입으로는 웃고 눈에는 눈물을 글썽이며 가까스로 안아 올리자 먼데이는 군복 어깨에 목을 올려놓고 짖는 건지 흐느껴 우는 건지 알 수 없는 묘한 소리를 내며 햇볕에 그을린 군인의 목을 핥았다.
역장도 먼데이의 이야기는 들어 알고 있었다. 그제야 역장은 이 귀환 군인이 누구인지 알았다. 먼데이의 오랜 불침번이 드디어 끝난 것이다. 젬 블라이드가 돌아왔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에 릴라는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우리는 모두 행복했고, 슬프고 또 감사했다. 하지만 수잔 아줌마는 그렇지 못했다. 하필이면 온종일 피곤하게 일해 그날 저녁은 있는 것으로 그냥 대충 때우기로 한 날 저녁에 젬 오빠가 집에 돌아온 충격에서 절대로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 식품창고에서 지하실로 미친 듯이 좋은 저장식품을 찾으러 뛰어다니던 수잔 아줌마의 모습을 난 절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식탁에 무슨 음식이 놓였는지 아무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는데도 말이다. 우리는 그날 저녁 입에 음식을 넣고 있을 정신이 아니었다. 그저 젬 오빠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고기를 먹고 향기로운 음료를 마시는 것처럼 배가 불렀다. 눈을 뗐다가는 젬 오빠가 사라져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엄마는 젬 오빠에게서 한순간도 눈을 떼지 못했다. 젬 오빠가 돌아오니 너무 좋았다. 우리 먼데이는 말할 것도 없었다. 먼데이는 잠깐 동안도 젬 오빠 곁에서 떠나려 들지 않았다. 젬 오빠의 침대 발치에서 자고 식사 시간에는 어김없이 젬 오빠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일요일에는 교회에도 함께 가 기어이 우리 신도석에 함께 있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먼데이는 젬 오빠의 발치에 자리를 잡고 앉으면 곧 잠에 빠졌다. 한번은 설교 도중에 잠이 깨서는 젬 오빠가 돌아온 것을 다시 환영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벌떡 일어나 계속 짖어대다가 젬 오빠가 안아 올리자 겨우 조용해졌다. 그러나 그 일을 문제 삼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메러디스 목사님은 예배가 끝난 뒤 우리 자리로 와서 먼데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믿음과 애정과 충성심은 어디서나 고귀하고 소중한 거다. 이 작은 개의 애정은 보물이야, 젬.”
어느 날 밤 젬 오빠와 나는 ‘무지개 골짜기’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전선에서 무서웠던 적이 있었느냐고 물었다.

젬 오빠는 웃었다.
“무서웠느냐고! 수십 번도 더 무서웠지. 두려워서 죽는 줄 알았어. 전에 월터가 겁이 난다고 하면 내가 얼마나 비웃었는데. 하지만 월터는 막상 전쟁터에서는 두려워하지 않았어. 두려움이 현실로 다가왔을 때는 두려워 떨지 않았다고. 단지 두려운 마음 때문에 두려워했던 거지. 월터 상관은 월터가 가장 용맹스러운 병사였다고 했어. 릴라야, 난 집에 돌아올 때까지 월터가 죽은 것도 몰랐단다. 지금 월터가 얼마나 보고 싶은지 몰라. 너랑 다른 식구들은 그 사실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겠지만 나는 그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아. 월터와 나는 같이 자랐는데. 우리는 형제라기보다는 동무 같았어. 우리가 어렸을 때 놀던 이 정다운 골짜기에 앉아 있으니 다시는 월터를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더욱 아프게 느껴진다.”
가을이면 젬 오빠는 대학으로 돌아갈 것이다. 제리 오빠와 칼도 간다. 셜리 오빠도 갈 것이다. 셜리 오빠는 7월에 집으로 돌아올 것 같다. 낸 언니와 다이 언니는 계속해서 아이들을 가르칠 것이다. 페이스 언니는 9월이 되어야 집으로 돌아온다. 돌아오면 페이스 언니도 역시 선생님이 될 것이다. 젬 오빠가 의과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는 두 사람이 결혼할 수 없을 테니까. 우나는 킹스포트로 가서 대학 가정과에 입학하기로 했다. 올리버 선생님은 로버트 그랜트 소령과 결혼하기로 했다. 그래서 행복해하고 있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행복’하다고 했다. 나는 올리버 선생님의 태도가 참으로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모두들 앞으로의 계획이며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다. 옛날보다 더 진지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몇 년을 잃어버렸지만 열심히 살아서 행복한 생활을 만들자고 마음이 들떠 있다.
젬 오빠는 말했다.
“우리는 새로운 세상을 살고 있어. 우린 이 새로운 세상을 옛 세상보다 더 좋게 만들어야 해. 새로운 세상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니까. 어떤 사람들은 새로운 세상이 왔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아직 우리가 할 일은 끝나지 않았어. 아니,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어. 옛 세상은 파괴되었지만 우리는 새로운 세상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해. 아주 오래 걸리는 일이 될 거야. 난 전쟁을 치르면서 깨달았어. 다시는 전쟁이 일어날 수 없는 세상을 만들어야 해. 우리가 군국주의에 치명상을 입히기는 했지만 그들은 아직 죽지 않았어. 그리고 독일로만 한정된 것도 아니야. 옛날 정신을 쫓아내는 것만으로 충분한 것도 아니야. 새로운 정신을 불러들여야 해.”
나는 젬 오빠가 한 이 말을 내 일기장에 적어두고 가끔씩 읽어보려고 한다. 내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힘들 때마다 그 말에서 용기를 얻고자 한다.

릴라는 한숨을 쉬며 일기장을 덮었다.
릴라의 마음은 지금 그 약속을 지키기 쉽지 않은 상태였다. 다른 사람은 모두 자기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울 특별한 꿈과 야망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릴라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쓸쓸했다. 무척이나 쓸쓸했다. 젬 오빠는 돌아왔다. 하지만 1914년 집을 떠날 때의 그 잘 웃던 어린 오빠가 아니었다. 그리고 오빠는 이제 페이스 언니의 사람이었다. 월터 오빠는 돌아올 수 없다. 짐스마저 떠났다. 갑자기 릴라의 세계가 너무 크고 빈 듯이 느껴졌다. 그런 공허한 기분이 들기 시작한 것은 어제 <몬트리올> 신문에서 2주일 전에 돌아온 병사들의 명단을 보다가 케네스 포드 대위의 이름을 발견한 뒤부터였다.
케네스 오빠는 집에 돌아왔다. 그런데 돌아온다는 편지도 보내지 않다니. 캐나다로 돌아온 지 2주 동안 편지 한 장 보내지 않았다. 릴라는 케네스 오빠가 자기를 잊어버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사이에 잊어버릴 일이나 있었다면. 내 손을 꽉 잡아주었던 일, 키스, 그 표정, 지나가는 감상에 젖어 한 약속. 모두가 바보 같은 일이었어.’

릴라는 어리석고 낭만적이고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하기 짝이 없는 바보였다.
‘그래, 앞으로는 현명해지자. 아주 현명해지고, 분별력 있게 행동해야겠어. 남자들도, 그들이 하는 행동도 경멸해줄 거야. 나도 우나 언니와 함께 대학교에 가서 가정학이나 공부해야겠어.’
릴라는 자기 방 창가에 서서 생각했다.
아름다운 라일락 빛깔 황혼이 깔린 ‘무지개 골짜기’에는 에메랄드색 어린 덩굴나무들이 무성했다. 하지만 릴라는 가정학 공부에도 사실 아무런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그렇다 해도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면 무엇이든 해야 했다.
현관 벨이 울렸다. 릴라는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층계를 내려갔다. 집에는 릴라 말고 아무도 없어서 나가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기분에 손님이라니! 생각만으로도 싫었다. 천천히 아래층으로 내려가 현관문을 열었다.
밖에는 군복을 입은 한 남자가 서 있었다. 키가 크고 눈과 머리가 검은 남자였다. 갈색으로 그을린 볼에는 가늘고 흰 흉터가 나 있었다. 릴라는 한순간 얼빠진 표정으로 뚫어지게 그 남자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이 사람이 누구지?
릴라는 그 사람을 분명 알았다. 어딘가 몹시 낯에 익었다.
“릴라, 나의 릴라.”
그가 말했다.
“케네스.”

릴라는 숨이 멎을 것 같았다. 그는 케네스였다. 그러나 그는 너무 나이가 들어 보였고 굉장히 달라졌으며 게다가 눈에서 입까지 난 흉터. 릴라의 머릿속에 춤을 추듯 생각들이 오갔다.
케네스가 멍해 있는 릴라의 손을 잡고 지그시 바라보았다. 4년 전 말라깽이 릴라는 이제 둥글둥글 균형 잡힌 몸매로 변해 있었다. 여학생을 두고 갔었는데 이제는 어엿한 여자가 되어 있었다. 아름다운 눈과 오목한 입술과 장밋빛 볼을 지닌 여자. 너무나 아름다운, 케네스가 꿈에 그리던 여자가 되어 있었다.
“릴라, 나의 릴라가 맞아?”
케네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릴라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몸이 떨렸다. 기쁨, 행복, 슬픔, 두려움, 그 길고 길었던 4년 동안 릴라의 마음을 아프게 한 온갖 감정들이 그 한순간에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요동치며 밀려 올라오는 듯했다. 릴라는 대답하려 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내~.”
한참 후에야 릴라가 혀 짧은 소리로 대답했다.

<The End>





하얀비둘기요님이 100포인트 선물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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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비둘기요 (♡.33.♡.172) - 2024/04/20 15:26:45

벌써 다 올리셨군요,수고했어요.

나단비 (♡.252.♡.103) - 2024/04/20 17:23:22

네. 같이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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